글쓰기가 어려운 때가 있다. 처음 시작할 때, 그리고 꽤 많은 글을 썼다고 생각할 때. 처음 시작할 때는 누구나 어렵고, 꽤 많은 글을 썼다고 생각할 무렵에는 나의 글이 생각보다 어쭙잖다는 자괴감으로 인해 글쓰기가 어렵게 다가온다. 임마누엘 칸트의 <판단력 비판>은 칸트의 다른 저서 <순수이성비판>, <실천이성비판>과 더불어 3대 비판서로 불리며, <판단력 비판>은 지난 2010년 대한민국 학술원 기초학문육성 우수학술도서로 선정된 바 있다. 하지만 철학에 관심 없는 일반인들이 읽기엔 꽤 어렵다. 난해하고, 이해하기 어려우며, 실생활에 도움이 되는지 의문이 든다. 한 가지 분명한 것은, 임마누엘 칸트가 3권의 책을 집필하지 않았다면, 3대 비판서도 세상에 없었을 것이라는 사실이다. 임마누엘 칸트가 남긴 3권의 고전에 임마누엘 칸트의 마음이 담겨 있다는 것은 사실이다. 그가 무슨 이야기를 전하고 싶어 했는지, 즉 그가 전하고 싶었던 이야기와 우리 사이에 놓여 있는 이해관계가 어떠했는지는 그리 중요하지 않다. 어쨌거나 그는 마음을 담아 기록을 했고, 글이 되었고, 책이 되었다. 우리의 글도 그러해야 한다.   모든 글은 마음이 담겨 있다. 마음을 담는 그릇으로서 쓰인 글은 내면의 이야기를 담고 있다는 점에서 독자가 생기기 마련이다. 첫 번째로 나라는 독자가 생기고, 그 독자는 내 이야기를 가장 즐거워하는 독자다. 이후 어떤 독자를 원하는지에 따라 담는 마음의 형태가 달라질 뿐이다. 작가가 꿈이라면 책을 쓰면 그만이다. 소설가가 되고 싶다면 소설을 쓰면 그만이다. 만화가가 되고 싶다면 만화를 그리면 그만이다. 마찬가지로, 글을 쓰고 싶다면 글을 쓰면 그만이다. 판단은 독자의 몫이지만, 밥벌이를 위한 글이 아닌 바에야 자신을 제외한 누구도 나의 글을 두고 무능력을 이야기할 자격을 갖추지 않았다. 오직 글을 쓴 저자, 자신의 무능력에 의해서만 글이 판정될 수 있을 따름이다. 숭고한 것의 감정의 질은 그 질이 어떤 대상에 대한 미감적 판정능력에 관한 불쾌의 감정인데, 거기에서 그 불쾌는 그럼에도 동시에 합목적적인 것으로 표상된다고 하는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일은 그 자신의 무능력이 같은 주관의 무제한적인 능력의 의식을 드러내고, 마음은 그 무제한적인 능력을 오직 그 자신의 무능력에 의해서만 미감적으로 판정할 수 있음으로써 가능하다.-<판단력 비판> B100, 임마누엘 칸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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