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일이 통일될 수 있었던 저력은 서독이 경제적으로 동독을 끌어안을 수 있는 힘이 있었기 때문이다. 우리 경제가 세계 5위 정도의 힘을 가진다면 북한 경제를 충분히 흡수하고 지원하여도 우리가 흔들리지 않는 저력을 갖게 된다. 실제로 독일이 통일될 당시의 서독의 경제력은 세계 1위였다. 그렇기 때문에 자신 있게 동독을 지원하였을 뿐 아니라 민족문제에 대하여 과감한 원조를 할 수 있었던 것이다.
사우디 한국 대사관 관계자는 물론 본국에서 장관들이 번갈아가면서까지 사우디에 고위층과 접촉하여 우리가 이 공사를 충분히 할 수 있다고 설득하였으나 불가하다는 입장이 변하지 않자, 세계에서 제일 못사는 나라, 한국이 어떻게 발전했는가를 보여주기 위하여 사우디 장관들을 여러 사람 초청하여 한국을 시찰하게 하였다.
그렇다면 외국에서는 참전 군인들에 대한 예우가 어떠할까? 호주의 경우, 외국인이라도 6ㆍ25 한국전에 참전한 군인이 이민을 와서, 시민권을 취득하면 자유민주주의를 위해 공산주의와 싸웠다는 공적을 인정하고 연합군의 일원으로 인정, 국가유공자로 자국 군인들과 똑 같은 예우를 법적으로 한다는 것이다. 이 현상을 보면서 국가의 장래가 암담할 뿐이다. 931번의 외침을 받은 이 나라가, 또 외침이 없다고 누가 장담할 것인가? 만약 전쟁이 발발할 경우, 누가 나라를 위하여 전장에 나갈 것인가? 이런 정부를 어떤 국민이 신뢰하고, 희생할 것인가? 보상도 모호한 기준을 만들어 편향적으로 시행하는 정부의 처사에 분노하지 않을 국민이 있을까!
1966년 3월 미국과 합의한 ‘브라운 각서’(Braun Memorandum)에서 한국은 충분한 명분을 세우면서도 철저한 실리를 얻는데 한 치의 착오도 없는 타협을 이끌어 냈다. 참으로 놀라운 일이며 이 외교적 성과는 외교가 아니라 하나의 예술 작품을 만들어 낸 장인의 결정품이라 하여도 과찬이 아니다.
1965년 12월 시작된 파병은 총 32만5,217명, 이 중 전사 5,099명, 부상자 1만1,232명의 고귀한 희생이 있었다. 특히 맹호부대를 비롯하여 청룡부대, 백마부대 등 참전 군인들이 미국으로부터 받은 전투수당과 여타 지원금은 총 66억 달러로, 당시로서는 상상도할 수 없는 엄청난 금액이었다.
Ⅲ. 세계로 나가는 한국 1. 메이드 인 코리아 새마을운동은 전 국민이 하나로 뭉칠 수 있는 동력이 되었으며 열심히 일하니 소득이 증대되고 그것이 실생활에 자리함으로 노동의 가치를 몸으로 체험한 농촌이 하루가 다르게 변화했다. 농촌의 변화는 이미 산업화의 언저리에 진입한 도시민들과 합의를 이룩하면서 전 국민은 새벽종이 울리지 않아도 일터로 나아가는 자조의 터전을 닦아갔다.
4. 농촌에도 전기가 여기서 특별히 언급할 것은 농촌의 “전화(電化)사업”이다. 1964년 한국의 농촌 전기 보급율은 12% 정도, 농민 8 가구당 1 가구만이 전기의 혜택을 받고 있었던 것이다. 1964년 서독 정부의 국빈 초청을 받고 갔을 때 농촌의 풍요로운 모습을 보고 몹시 부러워하면서 특히 농촌의 전화사업이 100%란 설명에 자극되어 귀국하자마자 바로 농촌 전화사업에 착수한 것이다. 그러나 사업 첫해인 1965년에 5만 3,000호에 전기를 가설하기로 되었는데 3만 8,000호에 그쳤다. 공사가 부진한 것에 대노한 대통령은 그 원인을 밝히라는 지시에 따라 조사한 결과 옥외 가설비는 정부가 부담하고 옥내 공사비는 수혜자인 사용자가 부담하는 것이 원칙인데 너무 가난하여 80달러밖에 되지 않는 자기부담금을 마련할 길이 없어 수혜를 포기한 것이다.
1973년 3월 11일 새마을운동의 기수로 명명된 이재영씨(경기도 이천시 부발읍 아미리)가 박정희 대통령이 주재하는 월간 경제 동향 보고회에서 새마을운동 성공사례를 발표하였고 이에 감명을 받은 박 대통령이 즉석에서 국민포장을 수여한 후 이 내용을 대한뉴스 제 870호로 방영하게 하였다. 이재영씨는 대통령이 거명한 최초의 새마을지도자였다. 일개 시골 마을의 대표가, 물론 새마을지도자라 하지만 대통령 앞에서 자신의 업적을 장황하게 발표하는 것도 민망하지만 그것이 뉴스로 제작되어 전국에 방영된 사실에 새마을지도자들은 높은 자긍심을 갖게 된 것이다.
3. 새마을운동 한국의 경제혁명이 성공할 수 있었던 가장 큰 요인은, 밝은 미래를 확신하는 최고지도자의 정확한 정책 판단과 투철한 의지와 국가 백년대계를 위해서는 인기에 연연하지 않겠다는 사명감이 있었기에 가능하였다. 또한 지도자의 정책이 옳다는 판단을 할 수 있었던 현명한 국민들이 어떤 고난도 함께하겠다는 신념이 있었기에 경제개발계획이라는 전대미문의 정책이 성공할 수 있었다. 따라서 정책의 성공은 국민들의 절대적 동의가 동반되지 않고서는 성공할 수 없다는 사실도 3공화국에서 체험하였다.
서독에 취업한 우리 광부와 간호사들이 본국에 송금한 총액은 연간 5000만 달러, 이 금액은 당시 한국의 국민소득의 2%를 차지하는 엄청난 금액이었으며, 이 달러가 고속도로와 중화학공업에 투자되었다. 이후 한국과 서독 간에는 금융 문제는 물론 정치적으로도 진정한 우방이 되었다.
독일은 우리나라에서 광부가 가기 전에 유고슬라비아, 터키, 아프리카 등지에서 많은 광부들을 데리고 왔었다. 이들은 아주 나태하여 결국 광산을 폐쇄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한국에서 온 광부들이 투입되면서 생산량이 엄청나게 높아지자 독일 신문들이 대대적으로 보도를 하였고, 이렇게 근면한 민족을 처음 봤다면서 한 달 급여 120달러에 보너스를 줘야 한다는 여론이 일어났다.
이 때 서독은 이미 선진국의 반열에 들어간 상태로 차관이 가능하였다. 하지만 문제는 독일어를 구사할 수 있어야 협상도 하고 구걸도 할 수 있는데, 독일어를 할 수 있는 사람이 한국에는 한 사람도 없었으니 당시의 우리수준이 어떠하였는지를 짐작할 수 있다. 그래서 독일 대사관에 연락하여 수소문 한 결과 한 사람을 발견하였다. 그 분이 현재 한국산업개발연구원 원장으로 재직하고 있는 백영훈 박사다. 전북 김제 출신으로 26세 때, 한국인으로서는 처음으로 독일 뉘른베르크대학에서 경제학 박사학위를 받았으며 귀국 후 중앙대학에서 교수로 재직하고 있다는 사실을 확인하고 최고회의에서 찾아 갔으나 병력미필자라 하여 논산훈련소에 입소, 훈련 중이었다.
역사는 과거와 현재의 대화라고 한다. 왜냐하면 과거라는 카테고리 속에는 수많은 경험이 농축되어 있고, 이 농축된 경험이 집약되어 하나의 역사를 형성하기 때문에 역사의 정확한 분별력이야말로 공동체가 선택해야 할 가장 중요한 덕목이 아닐까 한다. 그런데 어느 때부터인가 일부 계층에서는 우리 역사를, 특히 최근세사를 일방적으로 폄하하고 왜곡하는 것이 지식인의 당연한 책무인 것처럼 행위하고 국민을 오도하는 패배주의적 사관이 우리를 혼란스럽게 하고 있다. 우리 역사는 부정적인 것만이 전부일까? 국토의 분할, 친일파 문제, 민족 간의 전쟁, 군사 혁명, 독재체제, 광주사태, IMF 경제 환란 등이 우리 것의 전부일까?
지역 후배가 심각한 목소리로 나를 당황하게 했다. 요지는 이번 4ᐧ15 총선에서 이판사판의 심정으로 판세를 흔들고 싶다면서 확 뒤집는 데 앞장서겠다는 것이다. 왜냐 하고 물으니까 미래통합당이 공천한 것 보면 국민은 안중에 없고 공천관리위원, 그것도 벼슬이라고 조자룡이 헌 ..
부득이한 경우가 아니면, 특히 나이가 많은 층에서는 바깥 외출을 삼가라는 것이 우한 폐렴(코로나19) 확산을 방어하는데 기여하는 것이라고 하여 외출을 삼가고 있다. 말이 삼가지 참 답답하다. 이건 완전히 창살 없는 감옥이다. ..
오늘 한국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이 다 그런 것은 아닌지? 즐겁고 신명 나는 일은 사라지고 어떤 위기감 같은 것이 엄습하면서 초조감과 분노가 한 데 엉켜 이성적이어야 할 판단은 점점 흐려지고, 격정적 감정만 쌓여가고 있다. 말이 통하지 않은 세상, 상식을 거부하는 세상, 진실이 무엇이냐..
『한국인으로 태어나지 않아 다행이다』라는 저서를 발간하여 한국인들을 깜짝 놀라게 하였던 일본의 대표적 지한파(知韓派) 지식인인 무토 전(前) 주한 일본대사가 일본의 영자신문 ‘재팬 비즈니스 프레스’ 기고문에서 반미 ᐧ 반일 ᐧ 친중 노선을 고집하는 문재인 정부의 정..
조국 전 장관이 내 피붙이라면 눈알이 빠지도록 따귀를 한 대 갈기면서 “너 같은 X이 어떻게 감히 공직자가 되려고 생각하였느냐!” 그리고 “‘죽창’ 들자고 반일(反日)을 선동한 꼴이, 한 공직자의 일그러진 자화상의 극치”라고 일갈하고 싶었다. 공직자는 그 직위가 높고 낮음에 관계없..
이 글을 쓰는 것이 해병대에 엄청난 피해를 끼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염려부터 먼저 하게 되었다. 필자는 대한민국 해병대 ‘명예해병 46’번이다. 2003년에 이철우 사령관으로부터 임명을 받았으니 벌써 16년이란 세월이 흘렀다. 해병대를 얼마나 사랑했는지를, 해병대를 위해 얼마나 헌신했..
1975년 4월 30일 물밀듯이 닥친 월맹공산군은 ‘독립궁’에서 ‘두옹 반민’ 월남 대통령을 포로로 체포하자 월남공화국은 조종을 울렸다.월남이 패망하자 제일 첫 번째 검거된 자가 반정부 투쟁의 최선봉에 섰던 월남불교의 최고지도자(우리나라의 경우 조계종 총무원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