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
ⓒ 경상매일신문 |
|
타이타닉호 선장 에드워드 존 스미스의 고향인 영국 리치필드에 있는 그의 묘비에는 “영국인답게 행동하라(Be the British)”라는 말이 새겨져 있다.
1912년 4월 15일 타이타닉호 침몰로 1,514명이 사망하였으며 이는 평화시 해난 사고 중에서 가장 많은 인명피해를 기록하고 있다.
이때 선장은 구명보트에 탑승할 수 있는데도 불구하고 끝까지 승객들을 구출하는데 최선을 다하다가 배에 남아 수장되었으며, 7명의 항해사 중에서 3명도 함께 순직하였다.
어제 퇴근을 하는 전철 안에서 고등학생 3명이 즐겁게 대화하는데 필자가 끼어들었다. “학생, 이번 세월호 침몰시 친구를 위해 구명조끼를 벗어주고 본인은 다른 학생들의 탈출을 도와주다가 사망한 사람이 있는데 학생이 그와 같은 상황이라면 친구를 위해 구명조끼를 벗어 줄 수 있겠는가”하고 질문했다.
한참 망설이더니 “못 벗어줄 것 같습니다”라고 답했다. 참으로 솔직한 답변 같았다.
위급한 상황에서 친구를 위해 조그마한 희생이라도 할 수 있는 것은 평상시 그 사람의 인성과 성장환경, 교육의 힘이라고 생각한다.
순직한 학생에 관련된 기사들을 모아서 보니까 그는 평상시 남을 위해 습관적으로 희생하는 모습을 보인 학생이었다. 아마도 그 습관이 위급한 상황에서도 그런 숭고한 행동을 하게 되었으리라 생각된다. 저녁식사 후 식탁에서는 집사람이 늦둥이인 중학교 3학년 아들을 앉혀놓고 위급상황이 발생했을 때 어떻게 행동할 것인가에 대하여 교육을 시키고 있다.
“상황을 스스로 잘 파악하고 남들보다 신속히 대피하라”는 내용이었다. 즉, 남을 믿지 말과 본인 스스로 판단하고 행동하라는 것이었다. 그렇게 교육하면 않된다고 말했지만 사고로 숨진 학생들의 안타까운 사정을 보고 같이 눈물을 흘린 가정주부로서 혼란한 단면을 보는 것 같아 마음이 편치 않았다.
세월호 참사는 우리 사회의 온갖 모순과 부조리, 병폐를 고스란히 드러내고 있다. 한국사회의 겉모습은 선진국 문턱에 와 있고 많은 분야에서 세계 최고를 자랑한다. 하지만 화려한 모습 그 내면을 들여다보면 가려져 있는 후진성과 야만성이 드러난다.
여러 가지 이유가 있지만 무조건 최고가 되어야 하고 나만 많은 돈을 벌고 편하면 그만이라는 우리의 의식이 빚어낸 결과이다.
물론 이명박 정부때 규제완화 조치에 따라 여객선의 운용 연한을 20년에서 30년으로 늘린 것은 이번 참사의 직접적인 원인이라고 보기는 어렵지만 규제완화를 빌미로 기업들이 돈벌기에 혈안이 되어 일어난 결과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선장을 포함한 승무원들이 위기상황에서 모두 모여 논의한 후 승객들을 그대로 두고 탈출했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라는 것을 외신들도 앞 다투어 보도하고 있다. 이것은 우리사회의 책임자가 그 집단에서 최선을 다하는 것이 아니라, 나부터 먼저 살고 보자는 식의 불신을 여실히 보여준 것이다.
우리사회의 상위계층이 권한과 책임과의 연결고리를 깨어 버린 것이고 권한만 누리고 책임을 지지 않는 우리의 세태를 보여준 것이다. 세월호 선장은 “선실 안에서 기다리고 있으라”는 말을 남기고 모두 탈출해 버렸다.
교육의 현장에 있는 교사들과 학생들은 방송을 그대로 믿고 따랐다가 변을 당했다.
세월호 사건은 빙산의 일각일 수 있다. 이미 우리사회는 “나만 살면 된다. 나만 잘되면 된다”는 의식이 팽배해져 있다. 원칙과 배려, 존중과 이웃간의 사랑 등의 가치관은 이미 금전 앞에 무릎을 꿇었다.
그 동안 사회 리더들이 보여준 의식수준이 이런 사회적 분위기를 가속화시켰다고 볼 수 있다.
일국의 장관이라도 위장전입 쯤은 문제가 되지 않고 국민 세금으로 공적자금을 퍼부은 기관들이 그들만의 축제를 하는 등 윤리의식 눈높이는 이미 사회지도층에서부터 붕괴되었다. 이 상황을 어떻게 설명해야 할 것인가.
이 세상에는 아무도 믿을 사람이 없으며 자신만을 믿어야 한다는 사실과 나를 대신하여 혼탁한 이 사회를 바꾸어 줄 사람은 아무도 없다는 것을 단적으로 보여준다.
우리는 언제 “한국인답게 행동하라(Be the Korean)”고 말 할 수 있을까.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