춘추좌씨전에는 이런 글귀가 나온다. 거안사위 사즉유비 유비무환(居安思危 思則有備 有備無患), “편안할 때 위기를 생각하고 미리 준비를 하면 화를 피할 수 있다”라는 말로 국민 안전의 날(4.16)을 맞이해 다시 한번 마음 깊이 새겨본다.
안동시와 안동시의회가 삐걱거리며 시민의 눈살을 찌푸리게 하고 있다. 시의회는 시민의 목소리를 대변이라도 하는 양 사사건건 집행부를 공격하고 있다. 그런데 집행부도 시민들을 위해서나 안동을 위해서 하는 일이 별로 없다. 특히 물과 관련된 국과 부서를 만들고 예산까지 만들었으나 물 관련 사업은 끝내 부결되고 말았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은 두 번째 걸을 때의 이야기다. 딱 한 번뿐인 길을 이렇게 걷기는 쉽지 않다. 인생도, 까미노도 ‘딱 한번’이라면 어떻게 해도 아쉬움은 남기 마련이다. 이래도, 저래도 아쉬움만 남는다면 내 방식대로 살고, 걷는 게 상책이리라. ‘안녕히 계세요.’라는 인사를 남기고 외출한 팔로마는 아직 돌아오지 않고 있다.
제주 북촌 너븐숭이 공원 비에 젖는 수묵담채화 바위 웅덩이 옆 오래된 소나무가 추사체로 서 있네 그해 겨울 맨 손톱으로 판 바위 구덩이에 빗물이 팽팽 차오르자 피가 배어나온 붉은 수련
불행의 대부분은 경청할 줄 몰라서 그렇게 되는 듯. 비극의 대부분은 경청하지 않아서 그렇게 되는 듯. 아, 오늘처럼 경청이 필요한 때는 없는 듯.
아이 하나 낳고 셋방을 살던 그 때 아침 해는 둥그렇게 떠오르는데 출근하려고 막 골목길을 돌아 나오는데 뒤에서 야야! 야야! 아버지 목소리 들린다
봄비가 내려 온갖 곡식을 기름지게 한다는 곡우(穀雨)를 지난 요즘 사과, 배꽃이 만발한 농촌의 하루는 일손마저 바쁘다. 마스크의 착용 없는 일상의 지속과 직장인의 회식 그리고 농사철에는 한 잔의 술을 곁들이는 경우가 많다. 하지만 자제하지 않는 술잔의 시작은 대리운전과 대중교통을 이용해야 한다는 평범한 판단을 하지 못해 음주운전이 발생하고 심지어 사고로 이어지기까지 해 음주운전은 공공의 적(敵이)자 도로교통의 적신호가 되고 있다.
벨테브레는 1627년(인조 5)에 표착하였고, 조선에 귀화하여 조선 여인과 결혼하여 1남 1녀를 두고 훈련도감 관리로 벼슬살이를 하면서 병자호란 때는 전투에 참전하였다. 하멜이 표착한 시점에는 벨테브레는 조선의 훈련도감에서 중국에서 수입된 홍이포의 제작과 조종법을 가르치는 교관이었다. 그는 조선에 정착한 최초의 유럽인이었다.
푸른 불 시그널이 꿈처럼 어리는 거기 조그마한 역(驛)이 있다. 빈 대합실(待合室)에는 의지할 의자(椅子) 하나 없고
지난 4월 20일은 제43주년 장애인의 날이다. 장애인의 날은 단순히 장애인을 위한 날이 아닌 장애에 대한 국민의 이해를 돕고 장애인의 재활 의욕을 높이기 위해 제정된 ‘법정기념일’이다.
내가 채송화 꽃처럼 조그마했을 때 꽃밭이 내 집이었지. 내가 강아지처럼 가앙가앙 돌아다니기 시작했을 때 마당이 내 집이었지.
제4회 상주함창고녕가야 학술대회가 오는 5월 2일 오후 2시 문경문화예술회관 대강당에서 열린다. 이번 대회는 네 번째 학술대회로 문경시에서 적극 후원한다.
그리움이란 마음 한 켠이 새고 있다는 것이니 빗속에 누군가 그립다면 마음 한 둑이 무너지고 있다는 것이니
청나라는 광해군을 몰아낸 인조정권을 문책하며 병자호란을 일으켰다. 이 시기까지는 명과 청의 군사력이 큰 차이가 나지 않았으나 그로부터 9년이 지난 병자호란의 시점에는 청이 명에 비하여 압도적인 군사력을 보유하였고 조선의 대명 중심의 외교는 그 한계에 이르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조는 그를 왕으로 옹립해준 서인세력의 대의명분인 대명사대를 외교정책으로 고수할 수밖에 없는 상태였다. 왕권을 떠받치고 있는 서인들의 정권 유지의 명분이 곧 명나라를 섬겨야 한다는 대명의리(재조지은)였기에 인조는 이들의 주장을 거부할 수 없었을 뿐 아니라 이러한 정치이념은 다시 북벌정책으로 이어졌다. 그러나 북벌정책은 엄밀히 말하면 인조정권의 하나의 정치적 구호에 불과할 뿐 실행에 옮기기에는 역부족이었다. 조선의 조총부대가 잘 훈련되어 있기는 했으나 홍이포 등 서양에서 들여온 신식무기로 무장한 청나라에 비하여 조선의 군사력은 약했다.
휠체어에 앉아 하염없이 먼 곳을 바라보고 있는 노인을 지나쳐 가노라니 요양원의 침대와 휠체어에서 여생을 보내고 있는 어머니가 떠오른다. 가뜩이나 멜랑꼴리한 마음이 더 가라앉는다. 수십 미터를 가다 뒤를 돌아본다. 노인은 미동도 없이 앉아 있다. 휠체어를 좀 밀어 드릴까 물어볼 걸 그랬나? 이런 저런 생각에 젖어 있을 무렵 저 앞쪽에서 백마를 탄 두 남자가 강아지의 호위를 받으며 천천히 오고 있다. 좀처럼 보기 드문 장면이다. 가까이서 보니 앞사람이 형, 뒷사람이 동생 같다. 두 백마는 갓길을 앞뒤로 걷고 호위무사 강아지는 길 가운데를 걷는 모습도 재미있다. 뒤돌아보니 노인이 이쪽을 바라보며 그대로 앉아 있다. 백마를 탄 두 남자가 노인과 가까워지자 노인이 천천히 일어서더니 휠체어를 밀며 느린 걸음으로 뒤돌아간다. 먼 길을 간 두 아들이 온다는 연락을 받고 강아지와 함께 마중 나왔다가 강아지는 더 멀리 내 보내고 자신은 거기 앉아 있었던 모양이었다. 부모의 일생이란, 어머니의 일생이란.
청석 골의 단골 수선 집 늙은 재봉틀 한 대 아마, 지구 한 바퀴쯤은 돌고도 남았지 네 식구 먹여 살리고 아들 딸 대학까지 보내고
나무가 멀리로 떠나지 못하는 까닭은 제 몸에 쟁여놓은 기억이 많아서이다 얼룩종달이새의 첫울음이나 해질녘에서야 얇아지는 바람의 무늬 온종일 재잘대는 뒷도랑의 물소리들 나무는 그것들을 밤새 짓이겨 동그랗게 말아 올린 다음
그러나 조광조의 이러한 도학정치 사상은 후일 퇴계 이황 및 율곡 이이라는 거목을 통해 조선의 정신세계를 구축하였으니, 선조 대부터는 사림이 정계를 장악하여 조선왕조를 떠받치는 구심점이 되었다. 하지만 정권을 잡은 사림도 시간의 흐름에 따라 동서와 남북으로 분당되고 성리학을 유일한 정치이념으로 하는 폐쇄적인 정치체제를 고수함으로써 사상적으로는 다양성과 유연성을 잃어갔고 대외정책에 있어서는 쇄국정책을 고집하였다. 이러한 국가시책으로 인하여 조선 후기까지도 대외적으로는 이방인의 출입을 엄금하여 서구의 상업자본 세력과의 접선이 차단됨으로써 서구문명을 받아들일 기회를 놓치는 결과를 가져왔다. 이러한 조선의 경우와는 달리 동양에서 가장 먼저 서구의 근대 과학문명을 받아들인 일본은 서세동점의 시대적 변화에 발 빠르게 대처하였다. 그 후 일본은 서구세력이 그들에게 적용한 제국주의의 전철을 답습하며 마침내 20세기에 들어와서는 조선의 침탈에 나섰고 성리학적 유교관을 고집하던 조선은 일본에게 국권을 빼앗기는 수난을 겪게 되었다.
잠깐 갰다 비가 오고 비 오다간 다시 개니, 하늘의 이치가 이러하거늘 하물며 세상의 인정이랴 나를 칭찬하던 이가 오히려 나를 헐뜯고 공명을 피하던 이가 다시 명예를 구하려 하네 꽃이 피고 지는 것을 봄이 어찌 상관할 수 있으랴 구름 가고 오는 것을 산은 아니 다툰다네. 세상 사람들아, 모름지기 내 말 잘 새겨들으시오 즐겁고 기쁜 일을 평생 누리는 곳은 어디에도 없다는 것을
우리들은 400년 전 쯤 조선이라는 나라의 지배체제는 어떠했으며 백성들의 삶은 어떠했을까에 대하여 궁금해진다. 오늘날은 서구인의 관점에서 세계를 바라보는 시각이 보편화 되었지만 약 400년 전만해도 세계는 유럽 등 서양과 중국 등 동양으로 양분되어 세계질서가 움직이는 시대였다. 이때 동양에서는 중국을 중심으로 폐쇄된 교역체제를 유지하고 있었던 데 반해 서양은 해양세력들이 점차 동양으로 무역로를 개척하며 그 세력을 넓혀오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