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산 배치된 일행 중 하멜은 여수 수영의 진남관에서 문지기 생활을 약 3년간 하였다. 눈비가 올 때나 뙤약볕 아래에서나 온 종일 보초를 서야 하는 이들은 병영의 수군절도사(水使)가 어떤 사람이 부임해 오느냐에 따라 삶의 질도 달라졌다. 선정을 베푸는 사령관이 부임해오면 이들의 생활도 참을 만 했지만 혹독한 수사가 올 경우에는 견뎌내기 어려웠던 것이다. 훈련도감에 있을 때 탈출을 시도한 사건으로 인하여 죄인이 되어 방치된 이방인들, 조선의 입장에서는 없어도 그만인 귀찮은 존재였을 지도 모른다. 따라서 이들에게는 조선에서의 생활이 도저히 적응할 수 없는 열악한 환경이었던 것이다. 이 점에서 하멜 일행의 조선에서의 생활은 좋은 대우를 받으며 고관의 지위에까지 오른 벨테브레(박연)와는 커다란 차이가 있었던 것이다.
묵시아에서 29킬로미터를 걸어 피스테라에 도착했다. 긴 하루가 지나가고 새 날이 밝았다. 그렇게 2022년 6월 28일 월요일 오늘, 나는 더 이상 갈 곳이 없다는 0.00킬로미터 표지석 뒤로 펼쳐진 검푸른 대서양을 바라보며 오랫동안 상념에 젖어있다. 난생 처음 보는 대서양은 늘 보던 바다고, ‘세상의 끝’이라는 피스테라도 늘 밟던 땅이고, 그 곳을 보고 밟으며 서 있는 나도 어제의 나다. 다른 것은 없고 달라질 것도 없다.
대나무 두어 그루가 추위를 탔을까 외롭다 속삭이며 양지녘으로 옮아 서니 이웃에서 하나 둘 모여 살데 숲을 이루고 대통에 꿈을 키우며 살데 센 바람은 걸러내고 여린 미풍은 구름으로 풀어내며 대통으로 산소를 뿜어내데
남북산이 감옥에 갇혀 있으면서 단식투쟁을 하여 죽자 조선조정이 매우 걱정을 하였는데 청나라 사신이 끝내 불문에 붙였다는 위의 기사는 그 행간을 살펴보면, 결국 조선 조정은 청의 사신에게 거액의 뇌물을 주고 이 사건을 무마한 것으로 추측이 된다. 만약 이때 남북산 등이 청나라 사신에게 하멜 일행이 훈련도감에 배속되어 무기를 제조, 개발하는 일에 참여하고 있다는 사실을 실토해버릴 경우 조선은 청으로부터 강력한 문책을 당할 위험이 있었다. 청나라는 이 무렵 조선이 무기를 개발하며 북벌정책을 추진하고 있는지에 대하여 민감하게 반응하면서 조선에 대한 감시를 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하멜의 기록에는, 그뿐 아니라 하멜 일행의 난파선에 실려 있던 30만 냥 상당의 물품을 조선 조정이 무단으로 취득한 것을 청나라가 알게되지 않을까 조정이 심히 불안해했다는 것이다. 이에 사태를 진정시킨 조선 조정은 이 후 청의 사신이 다시 와서 그 전말을 조사할 가능성이 있다고 판단하여 하멜 일행을 멀리 격리시킬 필요가 있었다. 그 결과 하멜 일행을 전라도 강진 등 남해안지역으로 유배토록 조치하여 병영에 억류하기로 결정하였던 것으로 여겨진다
지그시 눈을 감고 고을 지켜 몇 해인가 꽃바람 살랑살랑 봄꿈을 꾸고 나서 자비론 미륵보살님 옛 이야기 들려준다. 산뜻한 오색 전각 석화 피운 삼층 석탑 파아란 하늘가에 꽃구름이 피어나고 아슴한 뻐꾹새 소리 산 꿩들이 울어싼다.
한편 북벌정책을 추진하던 효종은 하멜 일행에게 그들이 남만에서 왔으므로 남(南)씨 성을 하사하고 각자 이름도 지어주며 벨테브레처럼 하멜 일행을 훈련도감에 소속시켜 벨테브레의 휘하에서 무기제조에 기여토록 배려하였다. 이때 하멜의 조선식 이름은 ‘남하면’이었다. 그러나 하멜은 벨테브레만큼 조선에서 필요로 하는 인물로 인정받지 못하였고 한양에 체류하는 3년 동안 훈련도감에서 큰 실적을 내지 못했던 것 같다. 그래도 효종은 이들을 호의적으로 대하며 그들의 귀국 요청을 들어줄 생각도 했으나 당시 조정의 관료들은 완강히 이들을 국법에 따라 처리해야 하며 국외로 송환해서는 안 된다고 주장하였다.
춘추좌씨전에는 이런 글귀가 나온다. 거안사위 사즉유비 유비무환(居安思危 思則有備 有備無患), “편안할 때 위기를 생각하고 미리 준비를 하면 화를 피할 수 있다”라는 말로 국민 안전의 날(4.16)을 맞이해 다시 한번 마음 깊이 새겨본다.
안동시와 안동시의회가 삐걱거리며 시민의 눈살을 찌푸리게 하고 있다. 시의회는 시민의 목소리를 대변이라도 하는 양 사사건건 집행부를 공격하고 있다. 그런데 집행부도 시민들을 위해서나 안동을 위해서 하는 일이 별로 없다. 특히 물과 관련된 국과 부서를 만들고 예산까지 만들었으나 물 관련 사업은 끝내 부결되고 말았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은 두 번째 걸을 때의 이야기다. 딱 한 번뿐인 길을 이렇게 걷기는 쉽지 않다. 인생도, 까미노도 ‘딱 한번’이라면 어떻게 해도 아쉬움은 남기 마련이다. 이래도, 저래도 아쉬움만 남는다면 내 방식대로 살고, 걷는 게 상책이리라. ‘안녕히 계세요.’라는 인사를 남기고 외출한 팔로마는 아직 돌아오지 않고 있다.
제주 북촌 너븐숭이 공원 비에 젖는 수묵담채화 바위 웅덩이 옆 오래된 소나무가 추사체로 서 있네 그해 겨울 맨 손톱으로 판 바위 구덩이에 빗물이 팽팽 차오르자 피가 배어나온 붉은 수련
불행의 대부분은 경청할 줄 몰라서 그렇게 되는 듯. 비극의 대부분은 경청하지 않아서 그렇게 되는 듯. 아, 오늘처럼 경청이 필요한 때는 없는 듯.
아이 하나 낳고 셋방을 살던 그 때 아침 해는 둥그렇게 떠오르는데 출근하려고 막 골목길을 돌아 나오는데 뒤에서 야야! 야야! 아버지 목소리 들린다
봄비가 내려 온갖 곡식을 기름지게 한다는 곡우(穀雨)를 지난 요즘 사과, 배꽃이 만발한 농촌의 하루는 일손마저 바쁘다. 마스크의 착용 없는 일상의 지속과 직장인의 회식 그리고 농사철에는 한 잔의 술을 곁들이는 경우가 많다. 하지만 자제하지 않는 술잔의 시작은 대리운전과 대중교통을 이용해야 한다는 평범한 판단을 하지 못해 음주운전이 발생하고 심지어 사고로 이어지기까지 해 음주운전은 공공의 적(敵이)자 도로교통의 적신호가 되고 있다.
벨테브레는 1627년(인조 5)에 표착하였고, 조선에 귀화하여 조선 여인과 결혼하여 1남 1녀를 두고 훈련도감 관리로 벼슬살이를 하면서 병자호란 때는 전투에 참전하였다. 하멜이 표착한 시점에는 벨테브레는 조선의 훈련도감에서 중국에서 수입된 홍이포의 제작과 조종법을 가르치는 교관이었다. 그는 조선에 정착한 최초의 유럽인이었다.
푸른 불 시그널이 꿈처럼 어리는 거기 조그마한 역(驛)이 있다. 빈 대합실(待合室)에는 의지할 의자(椅子) 하나 없고
지난 4월 20일은 제43주년 장애인의 날이다. 장애인의 날은 단순히 장애인을 위한 날이 아닌 장애에 대한 국민의 이해를 돕고 장애인의 재활 의욕을 높이기 위해 제정된 ‘법정기념일’이다.
내가 채송화 꽃처럼 조그마했을 때 꽃밭이 내 집이었지. 내가 강아지처럼 가앙가앙 돌아다니기 시작했을 때 마당이 내 집이었지.
제4회 상주함창고녕가야 학술대회가 오는 5월 2일 오후 2시 문경문화예술회관 대강당에서 열린다. 이번 대회는 네 번째 학술대회로 문경시에서 적극 후원한다.
그리움이란 마음 한 켠이 새고 있다는 것이니 빗속에 누군가 그립다면 마음 한 둑이 무너지고 있다는 것이니
청나라는 광해군을 몰아낸 인조정권을 문책하며 병자호란을 일으켰다. 이 시기까지는 명과 청의 군사력이 큰 차이가 나지 않았으나 그로부터 9년이 지난 병자호란의 시점에는 청이 명에 비하여 압도적인 군사력을 보유하였고 조선의 대명 중심의 외교는 그 한계에 이르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조는 그를 왕으로 옹립해준 서인세력의 대의명분인 대명사대를 외교정책으로 고수할 수밖에 없는 상태였다. 왕권을 떠받치고 있는 서인들의 정권 유지의 명분이 곧 명나라를 섬겨야 한다는 대명의리(재조지은)였기에 인조는 이들의 주장을 거부할 수 없었을 뿐 아니라 이러한 정치이념은 다시 북벌정책으로 이어졌다. 그러나 북벌정책은 엄밀히 말하면 인조정권의 하나의 정치적 구호에 불과할 뿐 실행에 옮기기에는 역부족이었다. 조선의 조총부대가 잘 훈련되어 있기는 했으나 홍이포 등 서양에서 들여온 신식무기로 무장한 청나라에 비하여 조선의 군사력은 약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