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를 향해 도는 별을 태양은 버리지 않고 그 별을 향해 도는 작은 별도 버리지 않는 그만한 거리 있어야 끝이 없는 그리움
풀잎은 풀잎대로 바람은 바람대로 초록색 서정시를 쓰는 5월// 하늘이 잘 보이는 숲으로 가서 어머니의 이름을 부르게 하십시오
신록의 계절인 5월이 시작되었다. 5월은 가정의 달로 가족의 소중함을 다시한번 되돌아 보는 달이다. 그러나 가정의 달임에도 불구하고 가정폭력은 계속해서 일어나고 있다.
헨드릭 하멜이 조선에 표착한 것은 같은 네덜란드인인 벨테브레보다 약 26년 뒤의 일이었다. 하멜은 효종의 배려로 훈련도감에 소속되어 벨테브레의 지휘를 받으며 생활했다. 이들은 각자 화승총 한 자루씩과 화약, 총알을 지급받았고 봄에 3개월, 가을에 3개월씩 훈련을 받았다. 서울 체류 중에도 이들은 고국으로의 귀환의 꿈을 버리지 못했다. 틈만 나면 탈출의 기회를 엿보던 중 그의 일행 중 2명이 청나라 사신을 통해 귀국을 시도한 것이 발각되었다. 이 사건을 계기로 청나라 몰래 훈련도감에서 서양인을 고용하여 무기개발을 하고 있다는 사실이 알려질 경우 조선의 입장은 매우 난처해질 수밖에 없었다. 하멜은 서울에서 훈련도감의 벨테브레의 부대에 소속되어 있을 때에도 벨테브레에게 함께 탈출할 것을 권유한 적도 있었다. 그러나 벨테브레는 이를 단호히 거절하였다. 결과적으로 벨테브레는 조선에 귀화하여 잘 적응해 공적을 남긴 인물이 되었고, 하멜은 목숨을 걸고 탈출하여 조선을 서구 세계에 널리 알린 공적을 남겼다. 이것이 이들이 조선과 맺은 서로 다른 인연의 한 매듭이었다.
어스름 녘, 일을 끝내고 돌아가는 버스 안에서 꾸벅 꾸벅 졸다가 어깨에 얹혀오는 옆 사람의 혼곤한 머리, 나는 슬그머니 어깨를 내어준다. 항상 허세만 부리던 내 어깨가 오랜만에 제대로 쓰였다. 그래, 우리가 세상을 함께 산다는 건 서로가 서로의 어깨에 피로한 머리를 기댄다는 것 아니겠느냐 서로의 따뜻한 위로가 된다는 것 아니겠느냐
네덜란드도 본국인들의 송환을 위해 일본에 상당한 노력을 기울였을 것이고 이에 일본은 이런 기회를 이용해 네덜란드에게 유리한 교역조건을 제시하려 한 것 같다. 그렇기 때문에 일본은 조선에 대하여 억류한 네덜란드인들을 송환하라고 강력한 항의와 요구를 해왔다. 이때 일본은 조선에 남은 하멜 일행을 송환할 것을 강력히 요구하면서 그들을 돌려보내지 않은 이유를 따졌다. 이에 대하여 조선 조정은 지난 번(26년 전) 조선에 표착한 벨테브레(박연)를 왜관을 통해 일본에 보내려 했을 때는 벨테브레가 일본인이 아니라는 이유로 일본이 거부하지 않았느냐고 반박했다, 조선은 이것을 구실로 내세웠다. 그러자 이번에는 일본 측에서 하멜 일행이 표류했을 때 난파선에서 약 30만 냥에 해당하는 노획물만 빼앗고 이들을 억류한 것이 아니냐고 항의하였다. 이러한 과정을 거쳐서 조선 조정은 전라도에 남아 있던 하멜 일행을 결국 일본으로 송환하게 되었던 것이다. 다만 고국에 돌아갔을 때, 탈출한 자들과 송환된 자들 사이에 밀린 임금의 지급에는 차이가 있었다.
최근 경북지역에 발생하는 화재통계에 따르면 용접·용단 등 불티가 발생하는 작업으로 인한 화재가 증가하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작다고 무시했던 작은 불티로 인명, 재산 피해가 발생하고 있다.
아기 손가락만큼 한 문구멍으로 들어온 햇살이 눈부시다 아침에야 이르러 있는 그대로 드러내는 간밤의 어둠 속 먼지
분산 배치된 일행 중 하멜은 여수 수영의 진남관에서 문지기 생활을 약 3년간 하였다. 눈비가 올 때나 뙤약볕 아래에서나 온 종일 보초를 서야 하는 이들은 병영의 수군절도사(水使)가 어떤 사람이 부임해 오느냐에 따라 삶의 질도 달라졌다. 선정을 베푸는 사령관이 부임해오면 이들의 생활도 참을 만 했지만 혹독한 수사가 올 경우에는 견뎌내기 어려웠던 것이다. 훈련도감에 있을 때 탈출을 시도한 사건으로 인하여 죄인이 되어 방치된 이방인들, 조선의 입장에서는 없어도 그만인 귀찮은 존재였을 지도 모른다. 따라서 이들에게는 조선에서의 생활이 도저히 적응할 수 없는 열악한 환경이었던 것이다. 이 점에서 하멜 일행의 조선에서의 생활은 좋은 대우를 받으며 고관의 지위에까지 오른 벨테브레(박연)와는 커다란 차이가 있었던 것이다.
묵시아에서 29킬로미터를 걸어 피스테라에 도착했다. 긴 하루가 지나가고 새 날이 밝았다. 그렇게 2022년 6월 28일 월요일 오늘, 나는 더 이상 갈 곳이 없다는 0.00킬로미터 표지석 뒤로 펼쳐진 검푸른 대서양을 바라보며 오랫동안 상념에 젖어있다. 난생 처음 보는 대서양은 늘 보던 바다고, ‘세상의 끝’이라는 피스테라도 늘 밟던 땅이고, 그 곳을 보고 밟으며 서 있는 나도 어제의 나다. 다른 것은 없고 달라질 것도 없다.
대나무 두어 그루가 추위를 탔을까 외롭다 속삭이며 양지녘으로 옮아 서니 이웃에서 하나 둘 모여 살데 숲을 이루고 대통에 꿈을 키우며 살데 센 바람은 걸러내고 여린 미풍은 구름으로 풀어내며 대통으로 산소를 뿜어내데
남북산이 감옥에 갇혀 있으면서 단식투쟁을 하여 죽자 조선조정이 매우 걱정을 하였는데 청나라 사신이 끝내 불문에 붙였다는 위의 기사는 그 행간을 살펴보면, 결국 조선 조정은 청의 사신에게 거액의 뇌물을 주고 이 사건을 무마한 것으로 추측이 된다. 만약 이때 남북산 등이 청나라 사신에게 하멜 일행이 훈련도감에 배속되어 무기를 제조, 개발하는 일에 참여하고 있다는 사실을 실토해버릴 경우 조선은 청으로부터 강력한 문책을 당할 위험이 있었다. 청나라는 이 무렵 조선이 무기를 개발하며 북벌정책을 추진하고 있는지에 대하여 민감하게 반응하면서 조선에 대한 감시를 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하멜의 기록에는, 그뿐 아니라 하멜 일행의 난파선에 실려 있던 30만 냥 상당의 물품을 조선 조정이 무단으로 취득한 것을 청나라가 알게되지 않을까 조정이 심히 불안해했다는 것이다. 이에 사태를 진정시킨 조선 조정은 이 후 청의 사신이 다시 와서 그 전말을 조사할 가능성이 있다고 판단하여 하멜 일행을 멀리 격리시킬 필요가 있었다. 그 결과 하멜 일행을 전라도 강진 등 남해안지역으로 유배토록 조치하여 병영에 억류하기로 결정하였던 것으로 여겨진다
지그시 눈을 감고 고을 지켜 몇 해인가 꽃바람 살랑살랑 봄꿈을 꾸고 나서 자비론 미륵보살님 옛 이야기 들려준다. 산뜻한 오색 전각 석화 피운 삼층 석탑 파아란 하늘가에 꽃구름이 피어나고 아슴한 뻐꾹새 소리 산 꿩들이 울어싼다.
한편 북벌정책을 추진하던 효종은 하멜 일행에게 그들이 남만에서 왔으므로 남(南)씨 성을 하사하고 각자 이름도 지어주며 벨테브레처럼 하멜 일행을 훈련도감에 소속시켜 벨테브레의 휘하에서 무기제조에 기여토록 배려하였다. 이때 하멜의 조선식 이름은 ‘남하면’이었다. 그러나 하멜은 벨테브레만큼 조선에서 필요로 하는 인물로 인정받지 못하였고 한양에 체류하는 3년 동안 훈련도감에서 큰 실적을 내지 못했던 것 같다. 그래도 효종은 이들을 호의적으로 대하며 그들의 귀국 요청을 들어줄 생각도 했으나 당시 조정의 관료들은 완강히 이들을 국법에 따라 처리해야 하며 국외로 송환해서는 안 된다고 주장하였다.
춘추좌씨전에는 이런 글귀가 나온다. 거안사위 사즉유비 유비무환(居安思危 思則有備 有備無患), “편안할 때 위기를 생각하고 미리 준비를 하면 화를 피할 수 있다”라는 말로 국민 안전의 날(4.16)을 맞이해 다시 한번 마음 깊이 새겨본다.
안동시와 안동시의회가 삐걱거리며 시민의 눈살을 찌푸리게 하고 있다. 시의회는 시민의 목소리를 대변이라도 하는 양 사사건건 집행부를 공격하고 있다. 그런데 집행부도 시민들을 위해서나 안동을 위해서 하는 일이 별로 없다. 특히 물과 관련된 국과 부서를 만들고 예산까지 만들었으나 물 관련 사업은 끝내 부결되고 말았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은 두 번째 걸을 때의 이야기다. 딱 한 번뿐인 길을 이렇게 걷기는 쉽지 않다. 인생도, 까미노도 ‘딱 한번’이라면 어떻게 해도 아쉬움은 남기 마련이다. 이래도, 저래도 아쉬움만 남는다면 내 방식대로 살고, 걷는 게 상책이리라. ‘안녕히 계세요.’라는 인사를 남기고 외출한 팔로마는 아직 돌아오지 않고 있다.
제주 북촌 너븐숭이 공원 비에 젖는 수묵담채화 바위 웅덩이 옆 오래된 소나무가 추사체로 서 있네 그해 겨울 맨 손톱으로 판 바위 구덩이에 빗물이 팽팽 차오르자 피가 배어나온 붉은 수련
불행의 대부분은 경청할 줄 몰라서 그렇게 되는 듯. 비극의 대부분은 경청하지 않아서 그렇게 되는 듯. 아, 오늘처럼 경청이 필요한 때는 없는 듯.
아이 하나 낳고 셋방을 살던 그 때 아침 해는 둥그렇게 떠오르는데 출근하려고 막 골목길을 돌아 나오는데 뒤에서 야야! 야야! 아버지 목소리 들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