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북산이 감옥에 갇혀 있으면서 단식투쟁을 하여 죽자 조선조정이 매우 걱정을 하였는데 청나라 사신이 끝내 불문에 붙였다는 위의 기사는 그 행간을 살펴보면, 결국 조선 조정은 청의 사신에게 거액의 뇌물을 주고 이 사건을 무마한 것으로 추측이 된다. 만약 이때 남북산 등이 청나라 사신에게 하멜 일행이 훈련도감에 배속되어 무기를 제조, 개발하는 일에 참여하고 있다는 사실을 실토해버릴 경우 조선은 청으로부터 강력한 문책을 당할 위험이 있었다. 청나라는 이 무렵 조선이 무기를 개발하며 북벌정책을 추진하고 있는지에 대하여 민감하게 반응하면서 조선에 대한 감시를 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하멜의 기록에는, 그뿐 아니라 하멜 일행의 난파선에 실려 있던 30만 냥 상당의 물품을 조선 조정이 무단으로 취득한 것을 청나라가 알게되지 않을까 조정이 심히 불안해했다는 것이다. 이에 사태를 진정시킨 조선 조정은 이 후 청의 사신이 다시 와서 그 전말을 조사할 가능성이 있다고 판단하여 하멜 일행을 멀리 격리시킬 필요가 있었다. 그 결과 하멜 일행을 전라도 강진 등 남해안지역으로 유배토록 조치하여 병영에 억류하기로 결정하였던 것으로 여겨진다.
여기서 잠시 하멜이 바라본 조선 백성들의 국민성을 살펴보면, 하멜은 조선인들의 성격을 이중적으로 파악하였다. 먼저 “조선인들은 물건을 훔치고 거짓말 하고 속이는 경향이 강하다. 그들을 지나치게 믿어서는 안 된다. 그들은 남에게 해를 끼치고도 그것을 부끄럽게 생각하지 않고 오히려 영웅적인 행위라고 여긴다.”라고 하였는가 하면, 또 “ 또한 조선인은 성품이 착하다. 우리는 그들에게 우리가 원하는 것을 어떤 것이나 믿게 할 수 있었다.”라고도 기록했다. 이것은 하멜 일행이 대체로 살림이 넉넉한 사대부들보다는 주로 가난한 하층민들을 접한 결과로 보인다. 하멜이 조선에 머물렀던 시기는 조선이 소빙기를 맞아 대기근으로 식량이 부족하여 수많은 백성들이 굶어 죽는 시기였다. 이때 조선 백성들은 대부분이 도토리, 소나무 속껍질, 풀 등으로 연명했다. 냉해로 인해 농사를 망친 가난한 백성들의 고통은 말로 다할 수 없을 만큼 어려운 때였기에 살아남기 위해서는 남의 것을 훔치는 것이 예사로운 일이었을 수도 있었던 것이다. 이때 조선은 청나라로부터 곡식 수만 석을 지원받아 기아의 위기를 넘겼다. 그렇지 않았다면 조선 백성들이 훨씬 더 많이 굶어 죽었을 것이라는 소문이 돌 정도였다. 하멜은 그의 기록에서 이때 수 천 명이 죽었다고 적고 있으나 사실은 조선 백성 수십만 명이 굶어죽거나 전염병으로 죽었던 것이다. 실제로 그 후 숙종 때는 기근으로 140만 명이 굶어 죽기도 하였다.
한편 하멜 일행이 필사적으로 ‘탈출을 시도한 가장 큰 이유는 무엇일까?’라는 점도 궁금해진다. 아마도 이들을 한양에 체류시킬 경우 중국 사신과의 접촉을 우려한 조정이 군사기밀 유지의 차원에서 이들을 전라도로 추방하면서 이들을 방치했기 때문으로 생각된다. 하멜표류기를 자세히 읽어보면, 여러 번에 걸쳐서 “하느님을 믿지 못하는 곳에서는 하루라도 살기 어렵다. 배의 난파와 조선에의 표류, 그리고 우리들의 앞날의 운명은 모두 하느님께 달려 있다. 하느님을 믿지 못하느니 차라리 죽는 것이 낫다”라는 심정을 여러 군데 나타내고 있다. 이 시기부터는 조선 정부에서 이들을 보살피지 않았기 때문에 이들은 스스로 삶을 개척해나가야 하는 생활이었다. 강진의 좌병영에 7년간 억류되었던 이들은 이 후 여수와 순천에 분산 배치되었다. 이들은 교대로 병영에 나가 신상 점검을 받았고 때로는 생활고에 시달려 구걸까지도 하며 힘든 삶을 이어갔다. 그렇다면 하멜에게는 전라도 병영에서의 생활이 어떠했을까?
하멜은 이때의 생활을 적고 있다. “매일 우리는 여름철에는 뙤약볕 아래서, 겨울에는 눈비를 맞으며, 아침부터 저녁까지 대기 자세로 서 있어야 했다. 날씨가 좋으면 하루 종일 화살을 주웠는데, 그 이유는 그의 부하들이 일등 사수가 되려고 활 쏘는 연습만 했기 때문이다.”라고 한 점에서 이를 짐작할 수 있을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