헨드릭 하멜이 조선에 표착한 것은 같은 네덜란드인인 벨테브레보다 약 26년 뒤의 일이었다. 하멜은 효종의 배려로 훈련도감에 소속되어 벨테브레의 지휘를 받으며 생활했다. 이들은 각자 화승총 한 자루씩과 화약, 총알을 지급받았고 봄에 3개월, 가을에 3개월씩 훈련을 받았다. 서울 체류 중에도 이들은 고국으로의 귀환의 꿈을 버리지 못했다. 틈만 나면 탈출의 기회를 엿보던 중 그의 일행 중 2명이 청나라 사신을 통해 귀국을 시도한 것이 발각되었다. 이 사건을 계기로 청나라 몰래 훈련도감에서 서양인을 고용하여 무기개발을 하고 있다는 사실이 알려질 경우 조선의 입장은 매우 난처해질 수밖에 없었다. 하멜은 서울에서 훈련도감의 벨테브레의 부대에 소속되어 있을 때에도 벨테브레에게 함께 탈출할 것을 권유한 적도 있었다. 그러나 벨테브레는 이를 단호히 거절하였다. 결과적으로 벨테브레는 조선에 귀화하여 잘 적응해 공적을 남긴 인물이 되었고, 하멜은 목숨을 걸고 탈출하여 조선을 서구 세계에 널리 알린 공적을 남겼다. 이것이 이들이 조선과 맺은 서로 다른 인연의 한 매듭이었다.
오늘날 제주도 삼방산 자락에는 하멜기념비가 서있고 용머리해안가에는 하멜이 타고 온 스페르베르호의 모형을 세우고 그 안에 상선전시관을 열어 그의 흔적을 되새기고 있다. 하멜이 조선에서 탈출함으로 인하여 서구사회에 최초로 조선의 존재를 알리는 계기가 되었으며 오늘날에는 네덜란드와 한국의 우호 증진에 교량적 역할을 하고 있음에, 새삼 역사의 아이러니를 실감하게 된다. 현재 한국에 하멜을 기념하는 기념비나 조형물은 여러 군데에 존재하고 있다. 제주도와 여수, 강진 등 여러 곳에서 기념관을 세워 하멜을 기념하고 있으며, 하멜의 고향인 네덜란드의 호르쿰에서는 여수시에 하멜등대까지 기증하여 양국 간의 우호를 증진하고 있다.
조선에 13년간 억류 되었던 하멜은 비록 처음에는 언어도 잘 통하지 않았으나 그동안 조선말을 익혔고 조선인들과의 접촉을 통해 조선의 풍습, 제도, 정치, 사회, 문화 등 제반 사항에 대하여 폭 넓은 지식을 축적하였던 것이다. 장기간의 억류생활 경험을 적어놓은 ‘하멜표류기’를 통해 오늘날 우리는 400년 전 유럽인의 눈에 비친 조선의 모습을 보면서 하멜이 당시 조선의 실상을 꽤나 예리하게 관찰하고 분석을 하였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하멜의 기록에는 그들이 조선의 실상을 일부 잘못 이해한 부분도 없지 않으나 대체로는 당시 조선사회의 모습을 읽어내기에 부족하지 않다. 400년 전 하멜의 시각을 조선왕조실록이나 여타의 역사적 기록물을 통해 확인해 보아도 그의 관찰과 판단이 당시 조선의 상황을 매우 생생하면서도 정확하게 기록하고 있다는 사실에 놀라지 않을 수 없다. 하멜이 표착했던 시기 조선의 해양 정책은 폐쇄적이었다. 그것은 조선에 가장 큰 영향력을 가진 나라가 중국이었고, 중국과의 관계를 설정한 기본 틀이 해금정책(海禁政策)이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시대에는 그것으로 현실 문제를 해결할 수 있었고 중국을 세계의 중심으로 여기며 살았다. 그러나 조선이 바다 바깥의 서양 세계를 모른 채 안주하는 동안 세계사의 흐름은 바뀌어 갔고 우리에게는 시련이 다가온 것이다.
이에 비해 일본은 서구인들에 대하여 보다 개방적이었으며 서양의 문물을 도입하여 자국의 발전에 이를 이용하려고 노력하고 있었다. 이런 사실을 확인하면서 우리가 느끼는 감정은 “왜 조선은 그 당시 그렇게 답답한 정치를 하였을까? 좀 더 유연하게 세계적인 안목을 가질 수는 없었을까?”라는 자책을 할 수도 있다. 오늘날 한국은 세계 10위권의 경제력을 가진 강국으로 발전하였다. 우리는 역사 속에서 옛 일을 살피고 거기에서 오늘의 문제를 푸는 열쇠를 찾고자 한다. 그렇다면 세계사의 흐름 속에서 오늘 우리가 가지고 있는 사고의 방향은 얼마나 유연한가를 스스로 점검해보아야 할 때가 된 것 같다. 400년 전 서양인의 조선에 대한 경험을 통해 우리는, 그침 없이 전진하고 발전하기 위해서는 현실에 안주해서는 안 되며, 끊임없이 세계인들과 대화하는 삶을 살아야한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이것이 우리가 역사공부를 하는 이유이며 그래서 역사를 거울에 비유하는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