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시아에서 29킬로미터를 걸어 피스테라에 도착했다. 긴 하루가 지나가고 새 날이 밝았다.그렇게 2022년 6월 28일 월요일 오늘, 나는 더 이상 갈 곳이 없다는 0.00킬로미터 표지석 뒤로 펼쳐진 검푸른 대서양을 바라보며 오랫동안 상념에 젖어있다. 난생 처음 보는 대서양은 늘 보던 바다고, ‘세상의 끝’이라는 피스테라도 늘 밟던 땅이고, 그 곳을 보고 밟으며 서 있는 나도 어제의 나다. 다른 것은 없고 달라질 것도 없다.
10여 년 전 이 순례길을 꿈꾸기 시작했을 때는 순전히 아름다운 길을 걷고 싶었을 뿐이었다. 그러다가 하나 둘씩 다른 것들이 껴들기 시작했다. 그 중 하나가 머릿속 뿌연 안개를 걷어내고 싶다는 것이었다. 800킬로미터 아름다운 까미노 데 산티아고를 걸으며, 나의 60년은 무엇이었으며, 남은 시간은 무엇이라야 하는지를 확인하고 싶었다. 머릿속 안개를 걷어내면 형해화(形骸化) 한 60년 삶의 너머로 무엇인가 조금은 또렷하게 보이리라 여겼다. 까미노를 걸으며 2천 년 전 앞서 걸었던 야고보 사도와 같은 성자의 마음을 닮아보고 싶었다.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로서 부끄럽지 않게 한 생애를 살다간 그를 흉내라도 내는 삶을 살 수 있는 인연을 짓고 싶었다. 맹세컨대 누군가를 용서하고, 나 자신을 용서하자거나 ‘운명과의 화해’ 따위의 진부하고 가식적인 목적은 안중에도 없었다. 나는 누군가를 용서하거나 말아야 할 만큼 치명적인 피해를 입은 사람도 아니고, 나 자신을 용서할 만큼 뻔뻔하거나, 혹은 관대한 사람도 아니다. 나는 여전히 타인을 ‘수단’과 ‘도구’로 삼은 ‘잉간’들을 혐오할 것이며, 여전히 ‘잉간’에 대한 ‘혐오’를 놓아버리지 못하는 나의 협량함을 ‘부정적’으로 바라볼 것이다.나는 한 줌의 이익을 위해 초개처럼 의(義)를 저버린 ‘4비 잉간’들과 ‘두억시니’들에 대한 원망은 진즉에 다 소각해 버렸다. 낙엽은 가을바람을 원망하지 않는다고 했다. 다만 그들에 대한 혐오와 경멸은 지금의 내 마음그릇과 수행력으로는 어찌할 도리가 없다. 산티아고 순례길 한 번 걸었다고 갑자기 성자라도 된 듯 가식을 떨고 싶지는 않다. 이런 ‘정신적 방귀’가 반복되면 결국 거기에 질식하는 것은 자신이기 때문이다. 단지 언젠가는 야고보 사도가 형장으로 끌려가면서도 자신을 밀고한 자에게 했다는 그 말을 나도 할 수 있는 날이 오기를 고대할 뿐이다. 야고보 사도는 자신을 따라오며 용서를 구하는 밀고자를 따뜻이 안아주며 ‘평화가 그대와 함께 하기를 바란다.’고 축원해 주었다지 않던가. 내가 얼마나 더 깊어지고, 얼마나 더 곰삭아야 그런 날이 올지는 모르겠다. ‘잉간’에 대한 참을 수 없는 이 경멸을 거두어들이는 그날, 나는 비로소 나를 용서하고 견성(見性)할 수 있을까.‘마흔이 넘어서도 인간에 대해 환멸을 느끼지 않는 사람은 한 번도 인간을 사랑해 본적이 없는 사람.’이라는 말대로라면 나는 인간을 사랑한 대가를 치른 것에 불과하다. 나는 인간관계에서 그 무엇도 잃은 적이 없다. 모두 성공했거나 성공하지 못 했을 뿐이다. 처음에는 너무도 많은 것을 잃어버렸다고 탄식했지만 생각해 보니 나는 아무 것도 잃은 것이 없었다. ‘얻었다고 하지만 본래 있었던 것이며, 잃었다고 하지만 본래 없었던 것.’이라는 옛 성현의 말씀은 전적으로 옳았다.나는 ‘운명과의 화해’ 대신 도전하고 싸울 것이다. 운명이 나를 굴복시켜 내가 절망과 비탄 속에서 언제까지나 쓰러져 있기를 바랐다면 운명의 계획은 완전히 실패했다. 나는 나의 상처를 사랑하며, 운명의 광풍이 아니었으면 살아볼 기회조차 갖지 못했을 지금의 삶을 사랑한다. 나는 새롭게 펼쳐진 내 삶을 충분히 사랑하고 즐기는 것으로 운명이 내 앞에 무릎 꿇게 할 것이다.피스테라에 도착한 순례자들은 저마다의 의식을 치른다. 신발이나 옷가지, 혹은 특별한 물건을 태우기도 하고, 기도를 하기도 한다. 곳곳에 무언가를 소각한 흔적들이 보이는 것은 그 때문이다. 사람들은 그런 의식을 통해서 스스로를 위로하고, 용서하고, 잊어버리고, 새로운 약속과 다짐으로 자신을 추스르고 내일을 도모한다. 나는 아무 것도 버릴 것도, 태울 것도 없다. 간절히 기도를 올릴 것도 없다. 오직 걸어온 길을 톺아보고 걸어갈 길을 가늠해 볼 따름이다. 어떻게 하는 것이 저간에 내가 겪었던 고통을 가치 없게 만들지 않을지, 어떻게 하면 운명을 내 앞에 굴복시킬 수 있을지, 어떻게 하면 삶을 즐거운 유희로 만들 수 있을지를 생각할 따름이다. ‘왔다가 그냥 갑니다.’가 아니라 ‘신나게 놀다 갑니다.’라고 할 수 있는 삶을 살기 위해서 무엇을 해야 할지를 생각해 볼 뿐이다.니체는 <짜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에서 인간 정신의 3단계를 역설한다. 낙타의 단계, 사자의 단계, 어린 아이의 단계가 그것이다. 낙타는 주어진 운명에 복종하고 순응한다. 무거운 짐을 지고 불평 없이 현실을 받아들인다. 사자는 현실을 부정하고 운명에 저항하며 자유를 갈망한다. 어린 아이는 천진난만하고 성스러운 긍정과 창조의 존재다. 모든 것을 즐거운 놀이로 만든다. 최악의 삶은 낙타의 삶이다. 중간의 삶은 사자의 삶이다. 최고의 삶은 어린 아이와 같은 삶이다. 나쁜 감정을 쌓아두지 않으며 자신의 삶을 유희로 만들어 즐긴다.나는 낙타의 단계를 지나 지금 사자의 단계에 있는 셈이다. 나는 삶을 즐기는 어린 아이의 단계에 빨리 이르고 싶다. 그러기 위해 내가 해야 할 가장 중요한 것은 철저한 사자가 되는 것이다. 더 용맹하고 사나운 사자가 되어 운명과 맞서 싸워야 한다. 그래야만 마지막 단계인 어린 아이의 단계에 도달할 수 있다. 순응하는 낙타의 단계를 거치지 않고서는 용맹한 사자가 될 수 없고, 용맹한 사자의 단계를 거치지 않고서는 순수한 어린 아이의 단계에 오를 수 없다.남은 시간이 길지 않을 것이다. 머지않아 곧 ‘남은 거리 0.00킬로미터’라는 표지석이 눈앞에 나타나게 될 것이다. 그러기 전에 <노인과 바다>의 노인처럼 운명과 유감없는 한판승부를 벌여야 한다. 노인은 거대한 물고기를 향해 이렇게 말한다. “오, 나의 형제여, 나는 너보다 아름답고, 강인하고, 고귀한 물고기를 본 적이 없다. 자, 나를 죽여도 좋다. 누가 누구를 죽이든 이제 나는 상관없다.”
저 노인의 경지에 이르면 죽어도 즐겁게 죽을 수 있을 것이다. 삶이 유희라면 죽음인들 어찌 유희가 아니겠는가.돌아보면 모두가 한 바탕 꿈이었다. 지난 24년간의 꿈은 지금의 나를 있게 해준 고마운 시간이다. 이제 나는 돌아갈 것이다. 가면 또 다시 꿈을 꾸게 될 것이다. 나는 그 꿈을 즐길 준비가 되어 있다. 아직은 사자의 습성이 더 강하지만 나는 곧 어린 아이의 단계로 나아갈 것이다. 아무도 혐오하거나 경멸하지 않고, 아무 것도 마음에 담아두지 않으며, 모든 것에 천진무구한 웃음으로 대응하는 어린 아이의 단계에서 남은 길을 즐겁게 놀며 걸을 것이다. 그 길의 끝에서 백조의 처음이자 마지막 노래 ‘스완 송’ 하나 남길 수 있으면 좋고. ‘세상의 끝’은 내가 뒤돌아서서 걷자 다시 ‘세상의 시작’이 되었다.(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