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산 배치된 일행 중 하멜은 여수 수영의 진남관에서 문지기 생활을 약 3년간 하였다. 눈비가 올 때나 뙤약볕 아래에서나 온 종일 보초를 서야 하는 이들은 병영의 수군절도사(水使)가 어떤 사람이 부임해 오느냐에 따라 삶의 질도 달라졌다. 선정을 베푸는 사령관이 부임해오면 이들의 생활도 참을 만 했지만 혹독한 수사가 올 경우에는 견뎌내기 어려웠던 것이다. 훈련도감에 있을 때 탈출을 시도한 사건으로 인하여 죄인이 되어 방치된 이방인들, 조선의 입장에서는 없어도 그만인 귀찮은 존재였을 지도 모른다. 따라서 이들에게는 조선에서의 생활이 도저히 적응할 수 없는 열악한 환경이었던 것이다. 이 점에서 하멜 일행의 조선에서의 생활은 좋은 대우를 받으며 고관의 지위에까지 오른 벨테브레(박연)와는 커다란 차이가 있었던 것이다.
하멜은 조선을 탈출하여 일본을 거쳐서 본국인 네덜란드로 귀환하였다. 그리고 그동안 조선에 억류되었던 기간의 임금을 청구하기 위해 본국에 “귀국보고서”를 작성하여 제출하였던 것이다. 그것이 바로 ‘하멜표류기’이다.
이 표류기는 크게 표류기(漂流記)와 조선왕국기(朝鮮王國記)로 구성되어 있다. 아래에서는 네덜란드에 귀국한 하멜이 쓴 “귀국보고서” 즉 ‘하멜표류기’를 따라서 하멜이 조선에 체류하면서 보고 느낀 400년 전의 조선의 사회상을 살펴보기로 한다. 하멜이 제주에 표착한 이래 조선에서의 이동 노선을 보면, 먼저 제주에서 배를 타고 해남에 이르고 한양에 이르기까지는 육로로 말을 타고 하루 평균 약 45㎞씩 이동하였다. 그 경로는 해남-영암-전주-공주-한양에 이르렀고, 한양에서 훈련도감에 소속되어 일정 기간 체류하다가 조정의 명에 의하여 한양에서 다시 전라도로 추방될 때도 같은 경로를 따라 내려와서 여수, 순천, 강진에 각각 분리 수용되어 약 10년간을 지냈다. 그 중 조선에서 탈출에 성공한 하멜일행 8명은 여수 좌수영과 순천에 살던 사람들이었다.
이들은 여수에서 조선 어부로부터 작은 배 한 척을 사들여 탈출에 성공하여 일본의 나가사키에 도착했다. 이때 나가사키 총독이 여러 항목을 조사하고 있는데 그 중 주요 관심사가 조선의 국내 상황에 대한 것과 이들이 혹시 기독교 전도의 목적으로 일본으로 온 것이 아닌지를 확인하고자 한 것 같다. 나가사키 총독은 일단 이들이 기독교 선교 목적으로 온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확인한 다음 네덜란드 상관인 데지마로 인계하였다. 하멜 일행이 나가사키 총독의 심문에 대답하는 내용에는 그동안 조선에서의 이들의 생활이 자세하게 나타나 있다.
하멜은 일본 나가사키 총독의 심문에 대부분 사실대로 대답하였으나 일부의 사실들은 숨겼던 듯하다. 그것은 하멜이 네덜란드 본국의 총독에게 보고한 것과 다른 부분이 있기 때문이다. 그러한 내용은 주로 일본과의 교역상 장애가 될 만한 일들은 말하지 않았을 것으로 추측된다. 하멜 일행 8명이 2년 동안 나가사키의 데지마에 체류하다가 본국으로 돌아간 다음, 조선에 남아 있던 억류자 7명도 일본의 송환요구에 의하여 풀려났다. 조선 정부가 이들을 일본으로 보냄에 따라 나가사키로 돌아갔고 최후에는 네덜란드 본국으로 귀국하였다. 여기에는 일본 - 네덜란드 간의 무역에 대한 헤게모니 다툼으로 인해, 조선 - 일본 간에도 외교적인 실랑이가 벌어졌다. 즉 일본은 조선에 남은 억류자들을 일본으로 송환시켜 주면서 네덜란드로부터 교역상의 우위를 차지하려는 심사가 있었던 듯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