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덜란드도 본국인들의 송환을 위해 일본에 상당한 노력을 기울였을 것이고 이에 일본은 이런 기회를 이용해 네덜란드에게 유리한 교역조건을 제시하려 한 것 같다. 그렇기 때문에 일본은 조선에 대하여 억류한 네덜란드인들을 송환하라고 강력한 항의와 요구를 해왔다. 이때 일본은 조선에 남은 하멜 일행을 송환할 것을 강력히 요구하면서 그들을 돌려보내지 않은 이유를 따졌다. 이에 대하여 조선 조정은 지난 번(26년 전) 조선에 표착한 벨테브레(박연)를 왜관을 통해 일본에 보내려 했을 때는 벨테브레가 일본인이 아니라는 이유로 일본이 거부하지 않았느냐고 반박했다, 조선은 이것을 구실로 내세웠다. 그러자 이번에는 일본 측에서 하멜 일행이 표류했을 때 난파선에서 약 30만 냥에 해당하는 노획물만 빼앗고 이들을 억류한 것이 아니냐고 항의하였다. 이러한 과정을 거쳐서 조선 조정은 전라도에 남아 있던 하멜 일행을 결국 일본으로 송환하게 되었던 것이다. 다만 고국에 돌아갔을 때, 탈출한 자들과 송환된 자들 사이에 밀린 임금의 지급에는 차이가 있었다.
조선에서 먼저 탈출했던 8명의 하멜 일행은 본국으로부터 조선에 억류된 기간 13년 치의 임금을 전액 지급받았음에 비해 뒤에 송환된 인원들(7명)은 2년 치의 임금만을 받을 수 있었다. 네덜란드 본국은 하멜 일행이 타고 간 배를 잃어버렸기 때문에 임금을 최대한 적게 주려고 했다. 이에 대해 하멜이 네덜란드 본국과 치열한 임금투쟁을 한 끝에 성과를 이룰 수 있었다. 이런 사실들을 통해, 대항해시대의 해외진출 무역선의 활동이 단순히 선원 개개인의 사업이 아닌 국가적 차원의 해외무역 개척사업임을 알 수 있다. 네덜란드에 귀국한 하멜은 그 후에도 무역선을 타고 해외무역에 종사하였다. 이 시기 서구의 상업자본주의 시대상을 이해할 수 있는 대목이다.
하멜의 귀국보고서는 네덜란드에서 출판이 거듭됨에 따라 인기를 끌었고 그 때까지 잘 알려지지 않았던 조선이라는 나라에 대하여 서구인들이 보다 구체적으로 인식을 하는 계기가 되었다. 이에 따라 네덜란드는 동인도회사를 통해 일본뿐만 아니라 조선과 중국에 대하여 무역을 확대하려는 노력을 기울이기 시작했다는 점이다. 그런 의미에서는 하멜의 보고서는 네덜란드의 무역 대상국으로서의 조선을 인식하는 중요한 단서로 작용하였다고 볼 수 있다. 하멜의 본국 귀국 이후 네덜란드에서는 ‘코레아호“를 제작하여 조선으로 출항하려는 시도를 하기도 하였다. 일본의 방해로 비록 실현되지는 않았으나 조선을 네덜란드의 무역 상대국으로 검토하게 된 것이다.
하멜 이 후 조선에 대한 무역 및 동향을 보고한 사람으로는 니콜라스 비천(1641〜1717)이 있다. 비천의 보고는 하멜이 경험한 조선국보다 좀 더 구체적인 사항들을 포함하고 있는데, 그것은 일본과 중국의 정보를 통하여 보다 풍부해진 조선에 대한 사실들을 제시하고 있다. 그러나 어떤 부분은 하멜처럼 직접 경험한 것이 아니었기 때문에 잘못 인식된 부분도 없지 않았다. 예를 들면 조선이 일본의 속국이며 일본에 주기적으로 조공을 바친다는 정보 등이었다. 이것은 조선에 설치된 왜관의 실체를 잘 모르고 부산에 있는 왜관에서 곡식 등 조선이 바친 진상품을 일본인들이 모아서 일본으로 가져가는 것으로 인식했기 때문이었다. 그 뿐만 아니라 조선통신사가 일본을 방문하는 것 또한 조선이 종주국인 일본에 조공품을 헌상하러 가는 것으로 표현하고 있다. 이러한 인식들은 문명과 문화에 대한 인식의 오류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