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함석헌은 치밀한 준비와 규율이 필요한 간디의 비폭력주의 운동을 상세히 구체적으로 설명한 적이 없다. 대신 종교와 정치의 일치라고 하는 점에서 추상적이고 관념적인 신학적 설명에 치중했다. 그래서 함석헌은 실패했다." 재야 운동가이자 사상가였던 함석헌(1901-1989) 선생은 흔히 `한국의 간디`로 불린다. 일제 강점기와 해방 이후 군사정권에 맞서 싸우면서도 비폭력 평화주의를 한결같이 유지했다는 점에서 인도의 비폭력 저항운동가 마하트마 간디에 비견된다. 하지만 박홍규 영남대 교수는 사상적 측면에서 함석헌 선생과 간디 사이에는 "커다란 간극이 있다"고 지적했다. 박 교수는 우선 "두 사람 모두 민중을 말했으나 민중의 입장에서 사회주의를 받아들인 간디와 달리 함석헌은 사회주의를 거부했다"고 설명했다. 간디는 경제적 평등을 주장했고, 전면적인 토지개혁을 옹호했다는 점에서 `사회주의자`였지만 함석헌 선생은 이런 주장을 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또 "서양 기독교에 입각한 함석헌은 동서양을 철저히 구분한 오리엔탈리스트였고 한국을 비롯한 동양에 대해 열등감을 가졌다"면서 "그러나 간디는 서양의 오리엔탈리즘에 반대했고 인도문명에 대한 자부심으로 민중의 자부심을 고취했다"고 주장했다. 박 교수는 다음 달 3일 열리는 동아대 석당학술원 문화콘텐츠연구소 학술심포지움에서 함석헌 선생의 사상을 비판적으로 고찰하는 내용의 연구 논문을 발표한다. 박 교수는 `근대 정치공동체 사상에서 감각적 결속과 정념의 공동체에 대한 사유-함석헌의 간디 수용을 중심으로`라는 제목의 이 논문에서 함석헌과 간디 두 사람의 역사관과 동서양관 등을 비교했다. 간디의 비폭력 사상은 일제강점기 국내에 소개됐지만 `간디의 사상을 따르자`고 처음 주창한 사람은 함석헌 선생이었다. 선생은 1961년 60세의 나이에 쓴 `간디의 길`에서 "이제 우리의 나갈 길은 간디를 배우는 것밖에 없다"고 역설했다. 박 교수는 함석헌 선생이 간디의 사상을 수용하면서도 "선택적으로 받아들였다"고 분석했다. 박 교수는 특히 "당대의 한국 사상가 중에서 한국인이 못났다는 생각을 함석헌만큼 강하게 주장한 사람이 다시 없었다"면서 함석헌 선생이 `민족성 개조`의 방법으로 간디의 비폭력주의를 역설했다고 주장했다. 그는 "간디의 비폭력주의를 정치와 종교의 일치로 본 함석헌은 민족성 개조의 방법으로, 그리고 자신이 말한 섭리에 의한 고난으로부터의 부활 방법으로 비폭력주의를 주장했다고 볼 수 있다"면서 그러나 "이는 간디의 사상과는 달랐다"고 지적했다. 또 "함석헌은 특수한 엘리트였고 간디는 광범한 민중의 대변자였다"는 주장도 펼쳤다. 박 교수는 "함석헌을 되살리고, 한국을 되살리는 길은 간디의 사상을 더욱 완전하게, 비판적으로, 지금 여기에서 주체적으로, 그리고 현실적으로 수용하고자 새롭게 모색하는 길"이라면서 "그중에서도 가장 중요한 것은 우리의 전통과 역사에 대한 긍정적 태도"라고 강조했다. 한편 `식민성과 제국의 네트워크, 정념의 공동체`라는 주제로 열리는 이번 학술심포지엄에서는 `식민지 내부의 감각의 분할과 정념의 공동체`(권명아), `여가 창조를 통한 바다와 인간의 감각적 결속의 재구조화`(김미진), `드러난 연쇄, 숨겨진 공감`(신지영) 등의 연구 논문이 발표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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