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경시 영순면 왕태리 주변은 열두왕태로 알려질 만큼 오랜세월 개성고씨들이 세거해왔다. 신전리, 미르믈, 이산마 등 여러 가지 이름으로 불리지만 통칭 왕태로 통한다. 언제 왕이 다녀갔는지 어느왕이 태어났는지 알 수 없지만 오랜세월 동안 불리어온 마을 이름이다. 넓은 들판사이로 얕으막한 산들이 연이어져 있으며 산굽이마다 한적한 촌락이 형성돼있다. 왕의 태가 묻힌 곳인지 아니면 왕궁이 있었던 곳인지도 확인할 길 없지만 왕기가 서린 땅임에는 틀림없는 것 같다. 강이 있고 고성이 있고 넓은 들이 있고 뒷산에는 가야고분이 50여기 도굴된 채 뒹굴고 있다.  왕태리 뒷산에서 신전1리로 이어지는 산능선을 따라가면 전형적인 가야고분이 10여미터 간격으로 파헤쳐진 채 흩어져 있다. 고분군이 있는 왕태뒷산은 부드럽게 이어지는 야산으로 전면과 후면이 모두 평야다. 다른 지역의 고분군은 앞이 평야라면 뒤쪽은 산지로써 비교적 가파르게 이어져 있는것과 다르다. 고성, 합천, 창녕, 고령, 성주, 선산, 상주, 함창, 용궁, 예천, 안동으로 이어지는 낙동강 수계에 분포하고 있는 전형적인 가야고분군 단지다. 덮개돌규모는 상주병풍산이나 함창오봉산의 고분보다 넓은 판석이 사용됐음을 확인할 수 있다. 안동조탑동 덮개돌보다는 훨씬 크고 예천봉덕산의 판석규모와 비슷하다. 마을 바로 뒤편이어서인지 도굴되지 않은 대형봉분도 10여 기 확인할 수 있었다. 여자 유방처럼 둥그스럼한 것이 무덤인지 산봉우리인지 쉽게 분간하기 어려운 것도 예닐곱 기 보인다. 이 봉우리들이 고분으로 확인된다면 우리고대사를 확인할 수 있는 많은 자료를 확보할 수 있을 것이다. 고대사를 비롯해 역사를 공부하는 것은 미래를 설계하는 좌표이기에 국가지도자는 반드시 숙지해야 할 사안이다.왕태는 땅이 생긴 이래로 들과 강이 잘 발달되어 있다. 봉화군 선달산에서 발원하는 내성천과 문경시 황정산과 운달산에서 발원하는 금천(錦川)이 이곳에서 합류해 삼강에서 낙동강 본류와 만난다. 왕태리 맞은편에 있는 비룡산에는 고대의 토성으로 알려진 원산성이 소재하고 있다. 내성천(乃城川)이 용궁, 예천으로 이어지는 반면 금천은 왕태들녘을 가로질러 산양면과 산북면으로 이어진다. 내성천은 상류에서 내려오는 모래강으로 회룡포, 선몽대 등 보기드문 모래톱 절경을 이루고 있다. 금천은 비교적 짧지만 고대인들이 남긴 성혈석이 다수 분포하고 있으며 고대토성으로 근품산성을 끼고 있다. 왕태평야는 동으로 용궁에서 안동까지 이어지며 남쪽으로 함창, 상주로 이어지고 북으로는 점촌, 문경까지 닿아있다. 왕태를 중심으로 문경, 상주, 예천지방은 소백산맥이 지나가는 내륙의 산간이지만 물길과 함께 넓은 평야가 발달했으니 하늘이 내린 축복의 땅이다. 멀리 낙동강이 보이고 옆으로 삼강을 접한 굴봉산이 영순면 천마산으로 뱀처럼 이어져 있다. 왼편으로 금천이 흐르며 북쪽으로는 천주산, 운달산, 오봉산, 제악산이 달리고 있다. 신라, 백제, 고구려의 접경지이며 신라장군 김유신이 당나라군사 소정방을 주살한 곳이며 왕건과 견훤이 후삼국 통일전쟁을 시작한 곳이다. 역사적으로 낙동강을 포함한 삼강이 접해있는 왕태를 차지한 세력이 한강으로 진출해 나라의 주도권을 잡았다.왕태의 입지조건은 한강변 몽촌토성이 있는 암사동과 많이 닮았다. 원산성이 한강의 아차산성 역할을 했다면 서울암사동 선사유적지에 필적하는 삼강의 선사유적지가 있다. 거기에 더하여 낙동강 정수문화로써 가야 고분군이 현존한다. 고대의 역사문화를 간직하며 낙동강과 한강을 이어주는 징검다리 역할을 했던 왕태의 영광은 점차 역사속으로 잊혀가고 있다. 개성고씨들이 수백년 간 세거했지만 이제는 여느 농촌처럼 젊은이들은 떠나고 빈집과 노인들이 고토를 지키고 있다. 한편 머잖아 함창고녕가야 역사가 밝혀지고 낙동강과 한강을 이어주는 새 문화가 정착할 시점에 왕태의 전성기는 요원의 불길처럼 다시 일어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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