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깁토스에게는 50명의 아들이 있다. 다나오스는 아이깁토스의 쌍둥이 동생이며 50명의 딸이 있다. 다나오스와 50명의 딸들은 타고난 남자 기피증과 더불어 불경한 의도(다나오스가 사위의 손에 의해 죽게 될 것이라는 신탁을 의미하는 듯하다.)가 혐오스럽기 때문에 신성한 고향 땅을 뒤로하고 도망쳤다고 이야기한다.(탄원하는 여인들 1-10행) 다나오스는 딸들을 데리고 아르고스로 탈출한 뒤, 아르고스의 왕 펠라스고스에게 아르고스에서 머무를 수 있게 해달라고 간청하는데, <탄원하는 여인들>의 이야기는 그 장면에서 시작된다. 기원전 463년경에 쓰인 것으로 추정되는 아이스퀼로스의 비극 <탄원하는 여인들>은 그해에 비극경연대회에서 공연되어 우승을 차지한 작품이다. 하지만 단순한 플롯을 가진 것과 달리 이야기 자체가 상당히 모호한 데다 주제와 전개가 정확하게 짜여 있지 않다는 점에서 배울 점이나 숙고할 만한 주제거리를 찾기가 어렵다는 단점이 있다. 조금 어려운 표현으로 아르카익 archaios적 구성이라고도 이야기하는데, 옛스럽고 고풍스러운 데다 소박한 면이 있으나 기교가 부족한 작품이라는 뜻을 담고 있다. 이런 약점들을 고려한 뒤 작품을 접한다면 난민문제, 혹은 남북통일, 반인륜적이고 무자비한 사회와 조직의 형태에 관련하여 깊이 숙고해 볼 만한 주제를 던져주는 작품이라고 이해할 수 있을 듯하다.다나오스의 딸들 50명이 왜 결혼을 피했는지에 대해서는 알려진 바가 없다. 남성과 여성은 이성과의 결합을 통하여 새로운 생명의 창조하고, 가족구성원을 형성하고, 나아가 건강한 사회의 구성원이 되는 것이 기본인데 이들은 거부한다. 이들이 피신한 도시 아르고스의 국왕 펠라스고스도 재차 이유를 묻지만 알려주지 않는다. 다만 깊게 상고해보아야 할 중요한 사실 하나가 있는데, 다나오스의 딸들 50명은 모두 이집트에서 건너온 사람들이며, 그들이 건너간 아르고스는 아테네와 경쟁구도에 있었던 그리스 펠로폰네소스 반도에 있는 스파르타의 도시라는 사실이다. 난민 : 국제법상 인종, 종교, 민족, 특정사회집단의 구성원 신분, 또는 정치적 의견을 이유로 박해를 받을 우려가 있어 모국의 보호를 원치 않는 자. (나무위키 참조)사상과 정치적 신념 차이로 인한 국가의 분단은 어느 개인이나 조직의 노력으로 해결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라는 점에 대다수의 사람들이 동의할 것이다. 이런 국가 간 분단과 사상의 차이로 인한 분열은 사실 매우 민감한 문제이며, 해결하는 데에도 오랜 시간이 걸린다. 이런 상황 속에서 박해와 보복 등의 이유로 모국을 떠나 타국으로 떠나는 사람들은 난민이라는 이유로 이중의 피해를 입기도 한다. 극 중에서 다나오스의 딸들에게 결혼은 여성에게 허락된 궁극적인 성취, 그러니까 사랑하는 남자와의 결합과 가정의 결속을 의미한다기보다는 강압적이고 압제적인 국가, 즉 파시스트적 국가관을 주장하는 압제자에게로의 귀속을 의미하는 게 아니었을까 싶다. 그대는 높은 곳에서 굽어보시는 분을 바라보세요. 이웃집 문간에 앉아 법적으로 보장된 권리를 찾지 못하는 많은 노고에 시달리는 인간들의 보호자 말예요. <탄원하는 여인들 381-383>, 아이스퀼로스<탄원하는 여인들> 작품 속에서 가장 유명한 문장으로 일컬어지는 펠라스고스의 발언은 오래전부터 동경받는 국가관의 형태의 초석이 곧 민주정치였음을 알게 해 준다. 나는 그대들에게 아무것도 약속할 수 없소이다. 이 일에 관해 모든 시민들과 상의하기 전에는.<탄원하는 여인들 368-369>, 아이스퀼로스1980년 미국에서는 난민법(Refugee act of 1980)이 제정되었다. 매년 대통령이 의회와 의견을 조율한 뒤 수용할 수 있는 난민의 수를 정하는 법이다. 지미 카터 대통령이 취임하였던 그 해에 난민수용 상한선은 23만 1천 명이었다. 이후 점차 하락세를 보이다가 2000년대에 들어와 7-8만 명의 상한선이 지켜지는가 싶더니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 당시 1만 5천 명까지 떨어졌고, 난민 수용 상한선을 늘리겠다는 공약 아래 대통령 당선이 된 바이든 대통령은 상한선을 그대로 유지하겠다고 밝히면서 엄청난 비난을 받았다. 이주민이 더 나은 미래, 더 나은 삶의 행복을 위해 떠나온 외국인(foreigner)이라는 점에서 난민(refugee)과는 차이가 있다. 난민은 두려움과 고통, 핍박, 절망할 수밖에 없는 형편에서 벗어나기 위해 도움을 청하는 사람들에 가깝다. 이들에게는 꿈과 희망, 기회보다는 정직하고 올바른 법의 심판과 노력에 의한 대가가 주어지는 활기찬 사회문화가 더 절실하다. 앞서 <탄원하는 여인들>은 기원전 463년 비극경연대회에서 우승한 작품이었다고 이야기한 바 있다. 비극경연대회에 참석해서 공연을 관람할 수 있었던 사람들은 누구였을까? 남자? 여자? 좀 더 생각해 보자. 노예나 어린아이들은 과연 공연을 관람할 수 있었을까? 하인은? 이방인은? 변변찮은 직업조차 없었던 사람들이나 사회에서 직업을 가진 사람들은? 고아는? 초연결시대를 살아가는 지금도 존재하는 인종차별과 성차별은 기원전 400년 전만 하더라도 당연한 것이었는지 모른다. 그런 판국에 세계에서 가장 부유하고 활기찬 도시였던 그리스 아테네의 중심에서 울려 퍼지는 `흑인 여성들의 탄원`이 아테네의 중심축이었을 남성들에게 어떤 의미였는지 사뭇 궁금하다.단일국가라고 여겨진 한국에도 수많은 외노자들이 있다. 좋은 사장님을 만나 금의환향하는 외노자가 있는가 하면, 한겨울에 영하 17도 창고에서 쪽잠을 자다 얼어 죽은 외노자 여성도 있다. 그들도 아름다운 소년 소녀의 시절이 있었고, 누군가의 귀한 아들과 딸이었다. 어느덧 선진국으로 알려진 한국에 꿈과 소망을 쫓아서 온 사람들이었다. 이제 가슴에 손을 얹고 질문을 던져보자. 그들은 그저 한국에 돈을 벌기 위해 나온 가난한 외국인 노동자의 아들딸인가, 아니면 우리와 똑같은 육체를 가진 위대한 인간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