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상매일신문=박동수기자] 본관이 의성인 김성일의 자는 사순이며 호는 학봉이다. 의성김씨의 시조는 경순왕의 넷째 아들 김석이지만 실질적으로 기반을 닦은 인물은 학봉의 11대 조상인 김용비다. 그의 뒤를 이어 김의-김서지-김태권-김거두 5대가 고려조정에서 활약했다. 그 중 김거두는 경주부윤으로 재직할 때 삼국사기를 다시 발간하면서 발문을 쓴 인물인데 그가 바로 의성김씨 안동파의 시조다. 김거두는 안동의 유력 가문인 김방경, 권한공 집안과 연혼을 맺음으로써 의성김씨 안동파가 지역의 권문세족으로 자리 잡은 데 크게 한 몫 했다. 이러한 기반으로 의성김씨 안동파는 조선조에 들어와서도 김거두의 증손자인 김한계, 김한철이 문종 조에 문과에 합격하고 조정에서 크게 활약함으로써 가문의 위상을 이어나갔다. 더불어 김한계의 아들인 김만근은 당시 안동부의 재력가인 오계동의 사위가 되고 그의 아들 김예범 역시 청송 최고 부자인 신명창의 사위가 되면서 의성김씨의 강력한 경제적 기반이 완성됐다.김예범의 아들인 의성김씨 내앞파 중시조 청계공 김진은 학봉 김성일의 아버지다. 청계는 다섯 아들 모두를 훌륭하게 키워냄으로써 내앞 의성김씨의 수백년 터전을 단단하게 닦은 인물이다. 청계에게는 김극일, 김수일, 김명일, 김성일, 김명일 다섯 아들과 세 딸이 있었다. 학봉 김성일은 이중 큰형 극일과 16년이나 나이 차가 나는 넷째 아들이어서 4살 터울의 형 김명일과 3살 아래 동생인 김복일과 더불어 6살 때부터 효경을 배우는 등 함께 유년기를 보냈다. 10세 무렵부터 청계공 김진이 세운 부암서당에서 ‘소학’과 ‘사서’ 등 유교의 기본 경전을 배우다 17세에는 큰형 김극일의 임지인 홍원에서 과거문장을 배웠던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19세인 1556년에는 퇴계의 제자인 황준량이 주석하던 풍기의 소수서원에서 동생 복일과 과거공부를 하다 문득 도학에 대한 궁금증으로 도산의 계상서당으로 갔는데 여기서 평생의 스승인 퇴계를 만났다. 그때 퇴계는 56세의 나이로 성균관대사성에서 물러나 천명도설을 깊이 연구하고 있었는데 학봉은 과거 공부를 하면서도 도학에 대한 궁금증과 학문하는 정신을 퇴계로부터 배웠다. 21세(1558년)에 맏아들이 출생했는데 이쯤 퇴계에게서 ‘서경’과 ‘역학계몽’, ‘대학’, ‘심경’을 배웠다. 학봉이 24세(1561년) 되던 해 스승 퇴계는 환갑을 맞았는데 이때 도산서당이 준공되어 이곳에서 ‘태극도설’을 배웠으며 다음 해에는 주자의 편지 가운데 중요한 것을 가려서 묶은 ‘주자서절요’에 대한 가르침을 받았다. 학봉이 진사시에 합격한 것은 1563년 26세 때의 일인데 형 김명일, 동생 김복일과 동시 합격한 까닭에 집안 경사가 아닐 수 없었다. 이때 큰형 극일이 이미 대과에 급제하고 벼슬길에 있었기 때문에 뒷날 형 수일의 합격을 더해 5형제 모두가 과거에 합격했다. 진사시 합격으로 성균관에 유학할 수 있는 자격이 주어지자 학봉은 1565년 성균관에 유학했다. 이듬해 고향으로 오자 퇴계가 심법의 요체인 80자 병법을 손수 적어서 주었다. 학봉이 대과에 급제해 벼슬길에 오른 것은 31세 되던 1568년이었다.1570년은 학봉에게 기쁨과 슬픔이 교차하는 해였다. 아우 김복일이 대과에 급제한 반면 형 김명일이 과거보러 왔다가 건강이 악화돼 세상을 뜬 것이다. 그리고 그를 지탱해 주던 스승 퇴계마저 이해에 세상을 떠났다. 학봉은 자신의 한양 집에 빈소를 차리고 퇴계의 제자들과 곡했다. 학봉은 스승 이황이 조선에서 제일 먼저 심법을 널리 깨치고 알렸다고 말했다.세상사람 모두 이단을 숭상하니/누가 다시 용감하게 강물 막아 돌리나/상공께서 처음으로 심법을 천명하니/해와 달이 동해 사이에서 다시금 떠올랐네퇴계와 학봉의 각별한 관계를 추론할 수 있는 것이 ‘퇴계선생언행록’이다. 학문과 관련한 스승 퇴계와 제자의 문답을 정리한 이 책의 663항목의 질문 가운데 198건이 학봉이 퇴계에게 한 질문이다. 학봉의 질문은 이기론과 심성론에 이르기까지 두루 미치지 않은 곳이 없으나 주 관심사는 예론에 관한 것이었다. 이황은 학봉에게 “경건한 마음과 의리에 맞는 행동을 같이 지니고 넓은 배움과 깊은 사색을 함께 아우르라”고 가르쳤다. 학봉 또한 예가 하늘의 질서에서 나온 것이라 여겨 은혜가 있고 도리가 있으며 절차가 있다고 본 까닭에 하늘의 질서에 맞게 사람의 도리를 다하고자 평생 노력했다. 1571년에는 역사를 기록하는 사관으로 있으면서 스승에 대한 ‘만사’와 ‘퇴계선생사전’을 지었으며 그 다음해에는 소를 올려 노산군으로 있던 단종의 묘를 능으로 추존할 것과 절개를 지키다 목숨을 잃은 사육신의 관작을 회복시킬 것을 주청해서 관철시켰는데 이는 그동안 그 누구도 말하지 못했던 금기를 학봉의 기개로 해결한 일대 사건이었다. 1573년에는 사간원 정언으로 있으면서 경연에 나가 임금 앞에서 “전하는 요순 같은 성군도 걸주 같은 폭군도 될 수 있다고 될 수 있다”고 진언했다가 선조의 얼굴에 노기가 띠게 할 만큼 성정이 곧았다. 역시 같은 해 학봉은 조정에 퇴계의 시호를 요청했으나 행장이 지어지지 않았다는 이유로 차일피일 미뤄지자 1575년 7월 도산서원을 찾아 눈물을 흘리며 시 한 수를 적었다. 저문 구름 떠 있는가 유정문 닫혀있고/사람 없는 뜰가에는 달빛만이 가득하네/천길 높이 날던 봉황 어디로 날아가고/벽오동과 푸른 대만 해마다 자라는가 드디어 1576년 학봉이 이조좌랑으로 있을 때 그렇게 바라던 스승의 시호가 문순공으로 결정되자 임금의 교지를 받들고 도산으로 내려왔다. 그때 학봉은 임금이 엘리트 문관에게 독서휴가를 주던 사가독서를 받아왔던 터라 마음껏 학문할 수 있었다. 1578년 홍문관 교리가 되고 사헌부 장령으로 있는 동안에도 부정한 행위에 대해서는 지위고하를 막론하고 바로잡아나갔던 탓에 대궐 안 호랑이로 여길 만큼 모든 이들이 그를 두려워했다.42세가 되던 1579년에는 함경도 순무어사의 명을 받아 변방을 둘러보았는데 이때의 기록을 담은 것이 북정일록이다. 1580년 4월 윤달에는 아버지 김진이 세상을 떠나자 3년간 여막을 짓고 시묘살이를 하다 1582년 납실에서 서후 금계리로 이사했다. 시묘 살이를 마친 1583년에는 나주목사로 임명되어 1586년까지 그곳에 있으면서 대곡서원을 세우고 김굉필, 정여창, 조광조, 이언적, 이황의 위패를 모셨다.1584년에는 퇴계의 손자이자 벗이었던 이안도가 세상을 등졌다는 소식을 접하고 통고하며 스승의 학문적 성취가 사라질까 두려워 조목에게 하루빨리 스승의 원고를 정리하여 책으로 편찬해야 한다는 편지를 보냈다.이 같은 당부 때문이었는지 1585년 조목과 금응협 형제가 중심이 돼 ‘성학십도’와 ’계산잡영‘이 간행됐으며 이듬해에는 ’주자서절요‘와 ’퇴계자성록‘을 발간됐다. 그리고 1587년부터 학봉은 조목 류성룡과 더불어 ’퇴계문집‘을 교정한 후 다시 편집하기 시작했는데 수정의 방향을 두고 조목과 류성룡이 갈등이 지속되자 중재를 하고자 노력했다. 이해 친구인 권호문에게 받은 청선산에 3월부터 석문정사를 짓고 있었는데 7월에 권호문이 죽고 8월에 정사가 완공이 됐다. 1590년에는 일본에 통신사로 정사 황윤길 서장관 허성과 함께 부사로 갔다 돌아와서 정사 황윤길 서장관 허성과는 다른 보고를 해서 논란이 일었다. 이때의 기록인 ’당후일기‘에는 이항복이 선조의 질문에 “신묘년(1591년) 봄 신이 승지로 있으면서 학봉에게 일본의 일에 대해 물으니 성일이 도리어 깊이 걱정하면서 단지 남방을 방어하는 일로 민심을 소란하게 해 왜적이 이르기도 전에 먼저 나라의 기강이 무너지게 생겼으므로 민심을 달래고자 그렇게 말했다”는 구절이 나오고 ‘징비록’에도 “나라고 침략하지 않는다고 장담할 수 있겠는가? 다만 윤길의 말이 너무 지나쳐 나라가 혼란에 빠질까 그렇게 말했다”는 구절이 나오는 걸로 보아 학봉은 성을 쌓은 일보다 민심을 수습하는 것이 먼저라고 여겼던 것 같다.하지만 그가 1592년 4월 11일 경상도 병마절도사가 돼 임지로 떠나는 시간 임진왜란이 터지고 말았다. 불과 이틀 뒤인 4월13일의 일이었다. 그는 임란 중 경상우도 초유사가 돼 격문을 붙이고 관군과 의병을 연결해 적을 막는데 혼신의 힘을 다 기울였다. 김시민, 곽재우가 적과 맞서 싸우는 데는 그의 공이 매우 컸다. 그러던 중 진중에서 병이 깊어져 1593년 4월 29일 진주공관에서 순직했다. 1568년 벼슬길에 들어선 이래 1593년 전장에서 쓰러질 때까지 25년간 오로지 나라 위한 마음으로 관직을 수행했다. 총 1500여 편의 시를 지었다.                                                                                                                                        글 최성달 작가 사진 박동수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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