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나라는 광해군을 몰아낸 인조정권을 문책하며 병자호란을 일으켰다. 이 시기까지는 명과 청의 군사력이 큰 차이가 나지 않았으나 그로부터 9년이 지난 병자호란의 시점에는 청이 명에 비하여 압도적인 군사력을 보유하였고 조선의 대명 중심의 외교는 그 한계에 이르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조는 그를 왕으로 옹립해준 서인세력의 대의명분인 대명사대를 외교정책으로 고수할 수밖에 없는 상태였다. 왕권을 떠받치고 있는 서인들의 정권 유지의 명분이 곧 명나라를 섬겨야 한다는 대명의리(재조지은)였기에 인조는 이들의 주장을 거부할 수 없었을 뿐 아니라 이러한 정치이념은 다시 북벌정책으로 이어졌다. 그러나 북벌정책은 엄밀히 말하면 인조정권의 하나의 정치적 구호에 불과할 뿐 실행에 옮기기에는 역부족이었다. 조선의 조총부대가 잘 훈련되어 있기는 했으나 홍이포 등 서양에서 들여온 신식무기로 무장한 청나라에 비하여 조선의 군사력은 약했다.    이 시기 명나라나 청나라는 이미 홍이포(紅夷飽)라는 서양 무기를 도입하여 이를 전쟁에 사용하고 있었음에 비해 조선은 천자총통과 조총으로 대항해야 했으므로 신식 무기의 개발과 훈련이 시급한 실정이었다. 이때 나타난 표류인이 바로 네덜란드 출신의 벨테브레였다. 당시의 조선의 표류인 정책에 의하면 표착한 벨테브레를 명나라로 송환하여야 할 것이었으나 정묘호란으로 어수선한 시기라 송환이 쉽지가 않았고 무엇보다도 서양 무기의 제조·조작법을 잘 알고 있는 벨테브레가 총포의 개발과 조련에 있어서 조선에 꼭 필요했던 것이다. 이런 연유로 벨테브레는 훈련도감에 소속되어 무기개발과 훈련에 전념하도록 후한 처우를 해주며 그를 귀화시켜 조선에 정착케 한 것으로 생각된다. 실제로 벨테브레는 정묘호란과 병자호란에 직접 참여하여 전투를 하였고 그와 함께 표착했던 2명은 청과의 전쟁에서 전사했음에도 벨테브레는 전쟁에서 살아남았고 이후 그는 조선의 중요한 군사책임자로 고위직에까지 올라 군사정책에 참여함으로써 조선의 군사력 향상에 크게 기여하기도 하였다. 네덜란드인들이 조선과 인연을 맺게 된 것은 일본에 그들의 무역기지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16세기부터 서구문명을 받아들여 부국강병의 길을 모색해 온 일본은 나가사키를 개항하여 스스로 서구와 교류의 길을 열어간 데 비해 조선은 문을 굳게 닫아걸었다. 이 무렵 유럽에서는 동아시아를 향해 바닷길을 개척해 온 네덜란드가 인도네시아의 바타비아(오늘날의 자카르타)에 동인도회사 본부를 설치하고 동양의 향신료와 중국, 일본의 청화백자를 수입하여 이를 유럽에 되팔아 막대한 부를 축적하고 있었다. 특히 일본의 나가사키를 창구로 하여 상관(商館)을 열어 동양의 각국과 무역을 시도하게 되면서 나가사키의 데지마(상관을 설치한 인공섬)는 중요 무역항의 구실을 하였다.   조선 효종 때 동방무역에 나선 네덜란드의 무역선 한 척이 마침 타이완을 거쳐서 일본 나가사키를 향해 가던 중 풍랑으로 표류하여 조선의 제주에 표착하였다. 바로 하멜 일행이었다. 하멜 일행은 1653년(효종 4) 제주에 표착한 이래 13년간 억류 생활을 하다가 8명만이 탈출에 성공하여 나가사키를 거쳐 네덜란드로 돌아갔다. 이들이 조선에서의 생활을 보고서로 남겨 본국에서 출판한 책이 ‘하멜표류기’인데, 이 책은 당시 몇 판을 계속 인쇄할 정도로 선풍적인 인기를 얻었으며 한국을 세계에 알린 최초의 책이 되었다. 하멜은 네덜란드 상선 스페르베르호의 포수(砲手) 겸 항해기록관인 ‘서기’였다. 하멜은 부유한 집안에서 태어나 청년기에 동인도회사에 취업할 만큼 지식을 갖춘 인물이었고 취업 후에 승진도 빨랐다. 1653년 하멜 일행이 풍랑으로 난파되어 제주도 대정현에 표착하였을 당시 제주목사 이원진은 하멜 일행 36명을 접견한 후 조정에 보고하고 그 지시를 기다렸다. 이때 제주목사는 하멜 일행에게 일본어를 할 줄 아는 제주 현지인의 통역을 통해 물었다. “너희들은 서양의 길리시단(크리스챤)이냐? (爾是 西洋吉利是段者乎?)”라고 하자, 하멜은 “야(耶) 야(耶)”라고 답했다고 한다. 그리고 하멜 일행은 손짓 발짓을 다해 “우리는 일본 나가사키(郎可朔其)로 가고 싶다”고 했지만 의사가 통하지 않았다고 한다. 당시 제주목사 이원진은 실사구시적 가치관을 지닌 깨어 있는 사람이었다. 그는 실학자 성호 이익의 당숙(5촌 아저씨)이자, 반계 유형원의 스승이었다. 이때의 상황을 제주목사 이원진은 조정에 치계 하였는데 효종실록에서 찾아보면, 효종 4년(1653) 8월 6일조 기사에서는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다. 배 한 척이 고을 남쪽에서 난파하여 해안에 닿았기에 대정 현감 권극중과 판관 노정을 시켜 군사를 거느리고 가서 보게 하였더니, 어느 나라 사람인지 모르겠으나 배가 바다 가운데에서 뒤집혀 살아남은 자는 38인이며 말이 통하지 않고 문자도 다릅니다. 배안에는 약재, 녹비 따위 물건을 많이 실었는데 목향(木香) 94포, 용뇌(龍腦) 4항, 녹비(鹿皮) 2만7천이었습니다. 파란 눈에 코가 높고 노란 머리에 수염이 짧았는데 혹 구레나룻은 깎고 콧수염을 남긴 자도 있었습니다. 그 옷은 길어서 넓적다리까지 내려오고 옷자락이 넷으로 갈라졌으며 옷깃 옆과 소매 밑에 다 이어 묶는 끈이 있었으며 바지는 주름이 잡혀 치마 같았습니다. 왜어(倭語)를 아는 자를 시켜 묻기를 “너희는 서양의 크리스찬인가?”하니 다들 “야야”하였고, 우리나라를 가리켜 물으니 고려(高麗)라 하고, 본도(本島)를 가리켜 물으니 오질도(吾叱島)라 하고, 중원(中原)을 가리켜 물으니 혹 대명(大明)이라고도 하고 대방(大邦)이라고도 하였으며, 서북(西北)을 가리켜 물으니 달단(韃靼)이라 하고, 정동(正東)을 가리켜 물으니 일본(日本)이라고도 하고 낭가삭기(郎可朔其)라고도 하였는데, 이어서 가려는 곳을 물으니 낭가삭기라 하였습니다.“ 라 하였다. 이에 조정에서 서울로 올려 보내라고 명하였다. 전에 온 남만인(南蠻人) 박연(朴淵)이라는 자가 보고 “과연 만인(蠻人)이다.‘ 하였으므로 드디어 금려(禁旅)에 편입하였는데, 대개 그 사 람들은 화포(火砲)를 잘 다루기 때문이었다. 그들 중에는 코로 퉁소를 부는 자도 있었고 발을 흔들며 춤추는 자도 있었다.   하멜의 기록에 의하면, 제주목사 이원진은 국법에 따라 하멜 일행을 억류하기는 하였으나 부식을 제공하는 등 먹을 것과 입을 것을 보살피며 따뜻하게 대해주었다고 한다. 그러나 이원진이 과만(임기 만료)으로 체임되고 신임 목사(소동도)가 부임하자 사정은 달라졌다. 전임부사가 지급하던 부식을 중단시키는 바람에 하멜 일행은 밥과 소금으로 끼니를 이을 수밖에 없었다. 견디기 어려웠던 이들은 탈출을 시도해보았으나 실패하였다. 한편 조정에서는 네덜란드인으로서 하멜보다 26년 전에 표류하여 조선에 귀화한 얀 얀스 벨테브레(Jan Janse Weltevree, 조선 이름 : 朴淵박연)를 제주에 파견하여 하멜 일행의 표류 경위와 그들의 요구사항을 확인하게 하였다. 이때 벨테브레는 하멜 일행에게 자신의 처지를 이야기 해주었는데, 그 내용은 “조선에서는 표류한 유럽인을 송환하는 일은 없으며, 이 나라에서 남은 생을 살아야한다”라는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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