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강인’ 박태준 회장은 이렇게 말한다. ‘자원은 유한, 창의는 무한’이라고! 또 말한다. 원칙을 포기하지 마라. 신뢰를 얻으면 모두 얻는다. 사심 없이 헌신하라.
포스코가 오늘의 포스코가 된 게 바로 이것이다. 박태준 회장의 이런 정신과 혼신의 열정이 없었다면, 포스코도 없다. 포스코를 있게 한 것은 또 있다. ‘실패하면, 바다에 빠져 죽자’ 바로 이것이다.
1969년 세계은행은 한국에 종합제철소 건설은 경제적인 타당성이 없다. 박태준 회장은 이 보고서를 작성한 J 자페 박사를 다시 만났다. 이때에도 자페 박사는 똑 같은 견해를 밝혔다. 그럼 일본의 경우를 보자. 일본도 메이지 시대 때 종합제철소 건립을 시작했으나. 완공은 실질적으로 제2차 대전 이후에야 성공했다. 박태준 회장같은 철강인이 없었기 때문이다.
1978년 중국의 실권자 덩샤오핑이 신일본제철소를 방문하여, 중국에도 포철 같은 제철소를 지어달라고 말했다. 이나야마 회장은 ‘중국에 박태준 같은 사람이 없으면’, 포철 같은 것을 지을 수가 없다고 답했다. 이러자, 덩샤오핑은 ‘박태준을 수입하면 되겠다’고 응답했다.
그러나, 박태준 회장은 수입할 수가 없는 정신을 가진 인물이었다. 이나야마 회장은 ‘신일본제철이 가르쳐 준 게 아니다. 박태준이 잘한 것이다’라고 그 후에 박태준 회장을 평가했다.
박태준 회장은 1927년 부산에서 태어났다. 와세다 대학 재학 중에 조국의 해방을 맞았다. 귀국 후에 육군사관학교 전신인 남조선경비사관학교에 입학했다. 여기에서 전 대통령 박정희와 운명적인 해후를 했다. 이 후에 박정희 전 대통령이 쓴 일명 ‘종이마패’를 박태준 회장이 거머쥔다.
포항의 저명한 소설가 이대환이 쓴 ‘세계 최고의 철강인’ 에필로그에서 박태준 회장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간추리면, 북한도 대일 청구권 자금을 받아야 한다. 이게 현실이 되면, 내가 평양에 가서 코치도 할 수 있다. 박태준 회장에게는 오로지 철강뿐이다.
2011년 12월 2일 오후 2시, 포스텍 대학본부 옆 노벨동산에서 ‘청암 박태준 조각상’ 제막식이 열린다. 이는 단순히 포스코 창업자의 모습을 나타내는 게 결코 아니다. ‘자원은 유한, 창의는 무한’을 단지 그의 모습으로 표현한 것이다.
또 ‘누구든지 실패하면, 동해 바다에 빠져 죽자’는 그의 대쪽 같은 굽힐 줄 모르는 그의 정신을 조각상으로 표현한 것이다.
청암 박태준 조각상 건립위원회 백성기 전 포스텍 총장은 박태준 회장의 조각상 건립에 시민단체들이 뜻을 보았다. 지난달 1일부터 24일까지 총 2만1,973여 명이 자발적으로 동참했다. 이렇게 모인 금액이 총 7억5,508여만 원이다. 이 수치는 단지 사람과 금액을 말하는 게 아니다. 박태준 회장의 정신에 홀린 것이다. 박태준이라는 이름 그 자체가 철강전설이고, 철강신화이다.
청암 박태준 조각상은 중국 남경대 우웨이산 교수가 맡았다. 작품의 모양새를 보면, 평소에 즐겨 입든 코트와 중절모를 썼다. 전신상 전면에 철강거인(鐵鋼巨人), 교육위인(敎育偉人) 박태준 박사(朴泰俊 博士)란 글씨가 새겨져 있다.
다시 모금액을 낸 분을 돌아보자. 포항지역사회연구소에서만 총 6,739명이 동참했다. 포항상공회의소에서 665명, 포스텍에 접수된 시민 총 150명이다. 포항시민 총 7,564명이다. 무기명도 500여 명에 이른다. 이를 모두 합하면, 8,000여 명에 이른다.
모금을 낸 분들의 사정을 살펴보면, 박태준 회장이라는 인물을 더 잘 알 수가 있다. 한 어부가 전신환으로 2만원을 보냈다. 또 자발적으로 모금한 어느 분은 500여 명으로부터 총 211만3,000천 원을 모아 보냈다.
이런 참여와 모금을 볼 때에 청암 박태준 조각상은 단순한 조각상이 결코 아니다. ‘사람 조각상’으로서 박태준 조각상이다. 청암 박태준 회장은 한국 철강사를 새로 썼다. 특히 세계 철강사를 고쳐 썼다. 포항시민들의 남다른 포스코 사랑을 짚어보고 그리고 포항사랑을 다시 깨닫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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