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상매일신문=조영삼기자]울릉도 바다 암초에서 고려와 조선 초기 부터 시작됐던 수토(搜討) 유적이 처음 발견됐다.  이 유적은 국내는 울론 세계적으로 유례가 없는 희귀한 것이라서 앞으로 학계의 집중 조사가 실시될 것으로 보인다.기자가 최근 발견해 촬영에 성공한 이 유적(돌고리)은 고려에 이어 조선 초기 부터 본격적으로 울릉도.독도를 관리했던 수토 정책과 함께 농공상 등의 민간인 입출입과 관련한 귀중한 유적으로 앞으로 독도 영유권 보존 사업에도 중요한 증거가 될 것으로 보인다. 울릉도 수토란 고려, 조선 때 울릉도에 조정 관리를 파견해 주기로 순찰하며 섬을 관리하던 정책을 말한다. 파견되던 관리들은 고려에는 안무사, 조선 수토사 등으로 불렸다.이번 발견으로 인해 그동안 수수께끼에 쌓였던 이 관리들의 울릉도 입출항에 관한 정황이 확연히 드러났다.   관리들을 싣고 주로 강원도 울진 `대풍헌`에서 출발한 4~5척의 대형 돛단배는 울릉도 서면 태하, 학포 연안에 도착한 후 관리와 수행원 등을 전마선으로 육지에 이동시켰다.  이후 바로 인근의 `대풍감` 앞 암초(도끼바위)로 가서 바위에 연결된 부표에 선박 밧줄을 잇고 닻을 내린 채 출항할 때 까지 몇날이고 정박한 것으로 보인다.    이같은 정박 방법은 현재에도 어선, 상선들이 사용하고 있으며 울릉도에선 `낭중거리`라고 불리고 있다.   1970년대 초까지 포항~울릉도 도동항을 운항하던 여객선들도 정박시설이 없었던 도동항에 도착해서는 낭중거리로 정박한 후 `하시게`라는 대형 거룻배로 사람과 짐을 나르기도 했다.   7~8십명을 싣고 다니던 대형 돛단배를 연안에 그대로 정박시켜 놓으면 섬의 잦은 바다 날씨 변동으로 자칫하면 선박이 바닷가에 떠밀려 좌초되거나   피항하지 못해 침몰되는 경우도 있기 때문이다.    이런 사고는 울릉도에 항포구가 완벽하게 구축되지 않았던 1990년대 까지 자주 발생돼 선주들은 하루 아침에 알거지가 되기도 했다.   발견된 유적은 수토사나 전라, 강원도에서 온 어선, 상선 등이 육지로 나가기 위해 바람을 기다리거나, 울릉도에 도착해서 최고의 안전지대인 이곳에 선박을 정박해 놓기 위해, 선박 밧줄을 암초에 연결할 수 있도록 만든 돌고리들이다. 직경 10cm내외의 이 고리는 암초의 바다쪽 전면에 30여개나 빽빽히 만들어저 있다.고리가 있는 갯바위는 높이 5~6미터, 둘레 20여미터의 직벽으로 물 속에서 우뚝 솟아 올라와 있다.   기자는 옛날 수토사들이 주로 활동하던 서면 태하에서 레저보트를 4~5분 타고 도착한 현장에서 바위에 오르기 위해 수 차례나 시도했지만 마땅히 발을 딛고 오를 곳이 없어 보트에 탄 채로 사진촬영을  해야만 했다. 밧줄을 멜 수 있도록 파여진 수 십개 돌고리들은 오랜 풍화 작용과 침식 등으로 아주 자연스럽게 닳아져 있어 자세히 살펴 보지 않으며 그냥 지나칠 수 있다. 돌고리들의 귀가 떨어지거나 부서진 부분도 있었다.구멍들은 바위의 주름처럼 접히거나 튀어 나온 부분들을, 돌에 구멍을 뚫거나 쪼아서 다듬는 쇠로 만든 연장인 정으로 자연스러우면서도 정확하게 뚫어 놓았다.좋은 자리에 구멍을 확보하지 못한 어선들은 암초의 평평한 부분에서, 양쪽에서 마주보는 방향으로 비스듬이 땅굴 파듯이 정으로 쪼아 내려 간 후 어렵게 `맞구멍`을 내 고리를 만들기도 했다.    평면에 힘들도록 구멍을 뚫은 것으로 보아 아마도 돌구멍들의 주인들이 따로 있었고 이에 대한 `소유권 행사`가 이뤄진 것 같다.  돌구멍이나 그 연결줄에 주인을 나타내는 표식도 붙었을 것으로 보인다.이 바위는 울진 `대풍헌` 지명과 맥을 같이 하는 `대풍감`에 따린 암초로 이곳 일대는 섬에서도 일본에서 올라오는 남풍과 해류, 러시아쪽에서 내려 오는 북풍과 해류의 교차가 가장 빈번하게 이뤄지고 있다.  또한 남풍, 북풍을 가르는 바람 세기가 가장 적당하며 수심도 깊어서 대형 돛단배가 바람을 기다리기엔 최적의 장소로 보인다. 파도 방향에 따라 이쪽 바다나 저쪽 바다로 긴급 피항에도 최적의 장소이다.   기자가 현장 촬영을 하는 날에도 보트가 출발한 서면 태하 바다쪽은 물살이 조금 거세게 일었지만 바로 옆의 북면 현포 바다는 장판같이 고요해 대조를 이뤘다.서면 지역과 북면 지역의 경계선에 위치한 이곳에서는 서면에서 파도가 거세면 바로 옆 지역인 북면 바다로 옮겨 가면 된다. 반면 북면 바다의 파도가 거세면 서면 바다로 잠깐 사이에 이동해 버리면 안전 피항이 되는 것이다.요새도 북한 동해수역에서 오징어잡이를 하는 중국어선들은 파도가 궂은 날이면 긴급피항을 빌미로 울릉도까지 내려와 이같은 방법으로 자연스럽게 피항하곤 한다.바람을 기다리는 집이라는 뜻을 지닌 울진 대풍헌은 울릉도와 독도를 수색하기 위해 섬으로 가는 수토사가 순풍(順風)을 기다리며 머물렀던 장소다.이와 함께 울릉도의 대풍감(待風坎)은 `바람을 기다리던 절벽`이란 의미로 서로 맥락을 같이 하고 있다.대풍헌에서 울릉도 도끼바위까지는 직선거리로 130여 km인데, 순풍이 부는 날에 돛단배로 30여 시간이 걸리는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울릉군독도박물관은 "수토사 선박 등이 울진 일대   등 강원도에서 울릉도 뱃길을 잡은 것은 그곳이 울릉도까지 갈 수 있는 최단거리였기 때문"이라며 "현재도 울진 후포에서 울릉도까지 운항하는 정기여객선이 포항에서 출발하는 여객선보다 소요시간이 1시간이나 더 빠르다"고 설명했다.전 세계적으로 바다 바위에 선박의 줄을 연결하기 위해 수 십개 파놓은 돌고리는 그 유례를 찾아 볼 수가 없다. 지형지물을 최대 활용한 돌고리들은 우리 선조들의 항해술과 천체, 기상에 밝았던 해박한 지식들을 그대로 보여 주는 증거로도 볼 수 있다. 태하마을 주민 A씨는 "예로 부터 이 바위는 멀리서 보면 도끼를 닮아서 `도치바우`라 불리고 있어며 육지에서 온 선박들이 줄을 메고 있었다는 이야기들이 전설처럼 전해 오고 있다"며 "도치는 전라도 사투리로 1880년대 울릉도 개척 초기 전라도 어민들이 울릉도에 많이 거주한 영향인 것 같다"고 말했다.선박들은 돌고리에 밧줄을 바로 멘 것이 아닌 것으로 추정된다. 기자도 현장에 다녀와서는 바위구멍에 선박 밧줄을 직접 연결한 것으로 당연시 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의문이 들기 시작했다. 촘촘이 뚫린 고리에 수 십가닥 줄들이 연결되기도 어려울 뿐 아니라 이리 저리 꼬여 버렸을 때는 감당할 수 없는 비상 사고 상태에 이른다.  암초에 줄을 묶기 위해 배를 갖다 붙히는 경우에도 충돌로 인해 극히 위험하는 등 직접 연결 방법은 불가능한 것으로 판단됐다.   이에 울릉도 현지 어업과 바다 상황 등을 수 십 차례 검토한 후 아래와 같은 결론을 내렸다.  이 방법에 대해서는 앞으로 전문기관의 조사에서  밝혀 질 것으로 보인다.   먼저 정으로 정성스럽게 쪼아 만든 돌고리에 줄을 맨 후 그 줄을 바다 쪽 수면 위로 길게 끌고 갔다.그리고 오동나무 등 물에 잘 뜨는 통나무에 묶은 후, 이 통나무에 큰 돌로 제작한 `돌닻`으로 바다 밑에 고정시켜놓으면 큰 파도, 조류에도 휩쓸려 분실되지 않고 통나무는 그대로 뜨있게 된다.  현재도 어업인들이 사용하고 있는 부이나 부표같은 형태다.수 십개의 돌구멍들로 보아 도끼바위에서 뻗어나오는 `부이 밧줄`들은 부채살처럼 수 십개가 활짝 펼쳐져 장관을 이뤘을 것으로 보인다.   줄들의 길이도 제각기 달랐다. 줄들이 같은 연장선에 있어면 배들이 부딪히기 쉽기 때문에 길거나 짧게 해서 변형을 주었다.   게다가 줄이 서로 꼬이지 않게 쇠갈고리를 만들듯이 1차 지점, 2차 지점 등으로 구분해 섬에서 흔한 대나무로 안전하게 엮어 놓은 것이 확실하다고 본다.    이와 같은 기반시설이면 강원도와 전라도 여수, 거문도 등을 오가는 선박들은 이곳에 와서 위험한 암초에 배를 붙일 필요없이 물 위에 고정시켜 놓은 통나무를 끌어 당긴 후, 그곳에 연결된 바위 밧줄을 선박 고물(배의 뒷부분)에 이어 주고 선박의 앞(이물)에는 닻을 내려 해류, 바람 등에 떠나려 가지 않도록 고정시키는 것이다.지역 어민들은 "이 형태는 현재 울릉도에서도 고기잡이를 할때 쓰이고 있는 부표나 부이(buoy)와 같다"며 "부이와 부표는 위치 표식, 닻줄 대용 등 바다에서 다양하게 이용되고 있다"고 설명했다.모든 상황을 정리해보면 이곳은 소수의 선박 계류시설이 아니라 당시에는 바다 터미널같은 곳이었다.울릉도와 잦은 교류가 있는 전라도와 강원도에서 춟항한 대형 돛단배들이 섬에 도착, 안전하게 대기하거나 육지로 나가기 위해 바람을 기다리던 터미널같은 역활을 한 것이다.수십개의 돌구멍을 보더라도 이곳에서는 보통  20~30척의 선박들이 대기하면서 북적거리며 배 위에서 숙식을 해결하던 곳으로 볼 수 있다.    수토사들만 이 섬을 출입한 것이 아니다. 울릉도에 무진장 이었던 전복, 소라, 해삼, 돌미역과 그리고 당시 고가로 거래됐던 강치 가죽, 기름을 육지로 가져 가기 위해 매년 많은 선박들이 오고 간 것으로 보인다. 울릉도 개척 원주민으로 7대째 섬에 살고 있는 김모(62)씨는 지난 1980년대 100세로 생존했던 친할머니의 말을 떠올리며 "1880년대 개척 초기 할아버지, 아버지와 함께 섬에 왔던 할머니는 바닷가 늘어진 대나무 가지에 손바닥만한 전복이 숱하게 매달려 있었다고 여러 번 말씀하시는 것을 분명히 들었다"고 증언했다.   이와 관련 울릉도 토박이 정모(57)씨는 "1990년대까지 여름철 바닷가에 가면 전복을 밀릴 정도로 수시로 잡아 먹고 집으로 가져 와 나눠 주기도 했다"며  울릉도가 고급 해산물의 보고였던 것을 뒷받침했다.   조선실록 등 각종 기록에 따라 울릉도에 산삼도 많았던 것으로 확인되며 산삼과 관련한 심마니, 유통판매도 활발했다. 실제 심마니들이 숙식을 하던 곳인 `삼막`이 현재 그 지명 그대로 서면 학포 마을 인근에 있다.최근 울릉도 주민이 18뿌리의 대형 산삼을 발견해 산삼을 둘러 싼 옛 기록들을 증명하고 있다.또한 전국에서 유일하게 지름이 20cm나 되는 왕대나무도 군락들이 있어서 조정 진상품이나 어선들의 돛대로 사용하기 위해 비싼 값에 팔려 나간 것으로 보인다.특히 전라도 흑산도, 거문도, 여수 등에서 숙련된 배짓는 목수들과 그에 딸린 수 십명의 일행들은 봄철 남풍을 타고 울릉도에 들어와 최소한 1~2년을 기거하면서 만든 배를 남해안으로 가져가는 진귀한 풍경들도 펼쳐 졌던 것이다.이같은 정황은 이규원의 검찰일기(1883)에서 상세히 설명하고 있다. 아름드리 고목들이 빽빽하게 있는 울릉도에, 조선인들만 배를 짓는 것이 아니고 일본인 78명도 몰래  숨어 들어와 불법 벌목을 하고 있었다고 하니,   이곳은 동해 외딴 조용한 섬이 아니라 당시 최고 기술과 재력의 상징인 `조선소`가 최소한 5~6곳이 있었을 뿐 아니라 이것들을 매개체로 한 경제활동이 시끌벅적 번창했던 것으로 보인다.귀한 농수산물의 수확과 거래도 활발히 펼쳐 졌다.   섬에서 거주하는 사람들을 위해 식량, 간장된장, 소금, 피복, 부식, 농어업 및 벌목기구 등을 싣고 오는 전라도 상선들은 돌아 갈때 물물교환한 농수산물을 잔뜩 싣고 육지에서 최소한 5~6 배의 가격을  받고 되 팔기 위한 일확천금의 거래에 부풀어 있었다. 이같은 거래는 북풍한설 몰아치는 한 겨울철을 제외하고 섬에서 연중 진행된 것으로 짐작할 수 있다.   옛 울릉도는 육지사람들에게 `기회의 땅`이었으며 그 시작과 끝점에는 대풍감의 `도끼바위`가 당당하게 버티고 있었는 것으로 추정된다. 울릉군 수토역사전시관 관계자는 "울릉도 수토 정책은 1693년 울릉도에서 고기잡이를 하던 안용복 등 동래, 울산 어부 40명이 울릉도에서 고기를 잡던 일본 어부와 충돌하는 사건 이후 조선 정부는 울릉도에 군대를 설치할 것인지를 살피기 위해 1694년 삼척첨사 장한상을 울릉도에 파견하는 등 지속적인 관리를 이어 갔다"고 설명했다. 1694년 장한상을 최초의 수토사로 파견한 조정 관리인 삼척영장과 월송만호가 1894년까지 2백 년간 울릉도에 파견되면서 각종 기록과 각석문을 남겼다.하지만 이번처럼 암초에 희귀한 유적이 그대로 남아 있는 것은 처음으로, 앞으로 각종 학술조사가 활발히 진행돼야 할 것이다.국내 저명한 울릉도.독도연구가 H씨는 "역사적으로 굉장히 중요한 발견이고 유적이다. 지금까지 수토사들이 어떻게 입출항을 하고 바람을 기다렸는지가 오랜 숙제였지만 한꺼번에 모두 풀린 것 같다"며 "울릉도 수토정책은 독도 영유권 및 수토와 맞물려 있으며 수 많은 돌구멍으로 보아 예상외의 많은 선박들의 입출항이 이뤄진 것 같다. 세계적으로 유래가 없는 이 유적에 대해 학계의 연구조사가   속히 진행될 것"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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