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기도 남양주에서 출생하여 스물일곱 살에 문과 급제, 벼슬에 나아가 개혁군주인 정조 임금의 신임을 받았으나, 권력을 탐하지 않고 오직 도탄에 빠진 민생구제에 전력을 기울였다. 실학에 뛰어나 한강 배다리, 주교(舟橋)를 설계하고 1792년엔 수원 화성(華城)을 설계, 1794년 무거운 짐을 옮기는 기중기를 만드는 등 과학방면에 탁월하였다.  1797년 의학서적인 마과회통(麻科會通)을 저술하고, 이어서 ‘종두법’을 소개하여 치정(治政)의 혁신을 주도하는 듯하였으나, 1800년 그를 아끼고 밀어 주던 정조의 갑작스런 죽음으로 다산은 곤경에 처하였다. 개혁적인 남인을 제거하려던 노론들은 다산이 천주교도란 이유를 내세워 박해를 가하여 1801년 장기, 강진으로 유배의 길을 걷게 했다. 그러나 그의 애민정신은 그칠 줄을 몰랐고, 18년 유배생활을 하는 동안 목민관의 지침서인 ‘목민심서’ 등 오백여 권의 책을 저술하였으니, 한국 역사상 가장 탁월한 저술 활동을 펼쳤다. 다산 정약용(1762∼1836)은 18세기 말에서 19세기 초 조선사회가 요구하는 변혁의 시대를 살면서, 개혁의 방법과 방향을 제시함으로써 조선 후기 실학사상을 집대성한 인물로 평가된다. 그의 실학적 세계관은 주자학의 지배이념을 거부하고, 경전이 추구하는 본래의 정신적 기본과 시대적 변혁의 논리를 끌어내 새로운 경학(經學)을 열어주는 길을 제시하였다.   현실정치 상황을 직시하여 민생의 고통을 살피며, 부패하고 잔혹한 봉건적 지배의 질곡으로부터 민중을 해방시키는 계몽운동을 펼쳤던 것이다. 오랜 시간 중화(中華) 사상에 물들어 있던 우리의 역사와 지리, 풍속, 교육 등 다양한 영역에서 한민족 문화의 정통성을 발굴하는 실학적 의미에서 새로운 것을 발굴하는 것이었으며, 밖으로는 서양 기술을 수용하여 사회경제적 효율성을 추구하는 것이었다. 온고지신(溫故知新)의 실천 방향으로 낡은 관습의 고정관념을 깨뜨리고 새로운 시야를 열고자 하는 지성적 모험을 주장하였다.  다산(茶山)은 열여덟 살 때, 성호 이익(星湖 李瀷, 1681∼1763)의 실학적 문제의식을 가슴에 심어 그의 학문은 처음부터 권위에 순응하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탐험의 세계를 향한 모험이었다. 스물여덟 살에 문과 급제로 벼슬길에 나아갔으나 자신의 영달이나 권세에 탐닉하지 않고, 삶에 허덕이는 민생과 올바른 법적 정의를 찾아내는 정의감으로 험난한 길을 선택하였다. 서른세 살 때 암행어사로 경기도 연천지역을 돌아보면서, 농민들의 참담한 궁핍상을 직접 목격하고 지방관리의 탐학상에 분노하기도 하였다.   현지에서 살펴본 민생의 참혹상은 국가의 책임과 관리들의 잘못된 정책으로 백성이 고통을 겪고 있음을 깊이 깨닫게 했다. 그는 구시대의 생각에서 벗어나 새로운 방책을 궁구한 나머지 실학에 크게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그리고 다짐한다. 다산의 생각은 두 가지의 중요한 계기가 있었다. 그 중 하나는 스물세 살 때 이벽(李蘗)을 만나 서양과학과 천주교 신앙에 빠지면서 전해 오던 성리학적 세계관의 벽을 깨뜨려 버리고, 지금까지 듣지도 보지도 못했던 한없이 드넓고 눈부신 새로운 세계를 발견한 것이다. 결국 그는 이단(異端) 신봉자로 낙인찍혀 유배의 길로 접어들었다.   그리고 또 다른 하나는 마흔 살 때부터 장기⋅강진 등에서 오랜 유배생활을 하면서도 학문에 열중했다는 사실이다. 강진 만덕산 기슭 다산초당에서 18년간 그는 방대한 경전을 주석하고 《목민심서(牧民心書)》등의 경세론(經世論)을 저술하였다. 자연에 묻혀 초의선사(草衣禪師)와 교유하면서 예술의 꽃을 피워내기도 했다. 오백여 권의 책을 저술한 그의 열정과 학문에 대한 깊은 사고와 예술의 혼(魂)은 영원히 역사에 기록되었으리라.유배에서 풀려나 고향인 경기도 남양주시 능내리로 돌아온 뒤에도, 그는 자신을 알아 줄 후세를 기다리며 조선의 사상사에 가장 방대하고 창조적인 실학적이며 학문적인 업적을 완성하였다.   그의 저서《목민심서(牧民心書),《경세유표(經世遺表),《흠흠신서(欽欽新書)》 등으로 대표되는 다산(茶山) 실학은 ‘육경’(六經)과 ‘사서’(四書)의 주석(註釋)을 통한 철학을 바탕으로 한 경세론이었다. 그의 경전 주석체계는 서학적 세계관에 눈뜬 자신의 철학적 안목을 유교경전 해석에 창조적으로 활용하여 실학사상을 최고의 수준까지 끌어 올렸다. 그리하여 당시 동아시아를 통틀어 경학의 역사상 가장 위대한 업적을 이루었다고 할 수 있다.   송나라 주자(朱子)를 넘어선 경전 자체로 돌아가자고 선언한 것은 단순히 복고적(復古的) 입장이 아니라 학문적 진실성을 위한 비판적 입장이었으며, 성리학적 체계의 모순을 해결함으로써 실증적 실용정신을 주창한 개혁정신이었다. 다산은 스물세 살 때 저술한 ‘중용강의’에서 하늘이 명한 것을 성(性)이라하고, 性을 거느리는 것을 道라 하고, 道를 닦는 것을 敎라 한다는 “天”에 대한 의미를 새롭게 해석하면서 ‘천주교’의 하늘이란 교리를 깊이 받아들였다. 그가 서학(西學)을 받아들인 것은, 유교 사상을 파괴하려는 것이 아니라 지금까지의 유교경전에 새로운 정신과 생명을 불어 넣기 위한 것이었다.   비생산적인 논쟁을 탈피하여 시대에 적합한 실용적 철학 관념으로 현실성과 자율성에 의한 새로운 학문체계를 구축하기 위한 인간의지의 자율성과 실현 가능한 도덕적 책임을 강조하였다.   벼슬하는 관리가 민생(民生)에 도움이 되지 못한다면 이는 무능한 사람이 당파적 권력독점이나 부패한 관리가 탐욕과 농간으로 백성을 괴롭힌다면 학문적 의미가 없다는 것이었으니, 도탄에 빠진 참혹한 민생의 현실을 울분과 눈물어린 연민으로 바라본 것이다.   당시의 참상은 그가 詩를 통해 생생하게 묘사하고 통렬하게 비판하였다.그것을 타파하기 위해서 사회제도의 개혁을 주장하였고, 그 실현을 위한 실학적 경세론을 집대성하였다. 지배자와 피지배자는 처음부터 상하존비(上下尊卑)의 관계가 아니며 하늘 앞에서 모든 인간은 평등하다고 주장하면서 “나의 소망은 나라 안에 사는 백성을 모두 양반이 되게 하는 것”이라 선언하여 신분계급의 타파를 역설하였다.   고을 수령은 백성을 위한 관리이지, 세금을 거두는 수령(收領)이 아니라고 주장하면서, 관리는 백성의 부모 노릇을 해야 할 책무를 진다고 하였다. 그가 쓴 《목민심서》 첫 머리에 다른 벼슬은 모두 할 만하여도, 백성을 직접 먹여 살리는 고을 수령은 아무나 할 수 없다(他官可求 牧民之官 不可求也)라고 하였다. 다산 정약용은 뛰어난 정치가이면서 탁월한 과학자였다. 그는 천문⋅기상⋅의학⋅수학⋅기하학⋅농학⋅지리⋅물리⋅화학 등 다방면에 박학다식(博學多識)하였다. 그의 업적은 한강 배다리(浮橋)건설과 수원화성(水源華城) 설계, 기중기 발명, 종두법 등 획기적인 실용학문을 실천한 것이다.1792년 그는 수원화성을 설계하였다. 과학적이고 창의적으로 성문 앞을 반월형으로 만들어 적의 공격을 방어하기 위한 옹성(甕城)을 비롯해, 적이 성벽을 기어오르지 못하게 막기 위한 포루(砲壘)와 적루(敵壘), 적의 동태를 살피는 현안(懸眼), 적의 화공(火攻)을 방비하기 위해 물을 쏟아 붙는 누조(漏槽) 등 튼튼한 벽돌을 이용했음은 물론, 기하학의 원리를 이용, 성의 거리와 높이를 측정하여 견고함과 아름다움을 모두 갖추어, 도성으로서 손색이 없을 만큼 완벽하였다.   수원화성을 조성하기 위해 사역하는 백성들이 힘겹게 돌을 나르는 것을 목격하고, 그는 무거운 것을 쉽게 들어 올리는 기중기, 활차(滑車, 도르래) 바퀴 달린 달구지(鼓輪) 등을 만들어 축성에 도움을 주었다.과학적 기계를 발명함으로써 인력과 경비는 물론, 시간을 절약하는 데 큰 역할을 하였다. 기중기 사용으로 절감된 비용은 4만 냥에 달했을 정도이다. 일반 백성을 부역에 동원하지 않고 수원화성을 축조하고 싶었던 다산과 정조의 꿈이 실현된 현장이었다.   그리고 그는 천연두 처방 등 생활의학 정보를 기재한《마과회통(麻科會通)》이란 의서(醫書)를 짓기도 했으니, 백성을 사랑하는 애민(愛民)정신이 남달랐다. 그런 그가 천주교와 관련되었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정치적 수세에 몰려 세상과의 절연(絶緣)을 강요당하였다. 초기 천주교를 도입한 이승훈(李承薰)은 다산의 큰 매부였고, 이벽은 큰형 정약현(丁若鉉)의 처남이었으며, 불란서 함대를 요청한 황사영은 정약현(丁若鉉)의 사위였다.   그리고 신해박해와 황사영 백서사건으로 인해 신지도, 흑산도로 유배되어 생을 마친 정약전(丁若銓)은 둘째 형이었으며, 신해박해 때 순교한 정약종(丁若鍾)은 셋째 형이었다.   다산은 39세 때인 1800년에 이미 정적들의 질시가 박두하였고, 천주교와 관련된 무고가 너무 많아서 벼슬을 버리고 고향으로 돌아갔다.정조는 다산이 그리워서 책(策)을 내려 자주 안부를 묻기도 하였다. 그러던 어느 날 6월 28일 정조가 갑자기 세상을 떠나니, 다산의 정치적 입지가 더욱 위태하였다. 갑작스런 정조의 죽음으로 어린 순조가 즉위하였다. 이에 수렴청정에 나선 정순왕후 김씨와 보수 세력의 공격 앞에 다산은 무방비로 노출되었다.이러한 상황에서 수렴청정 하는 정순왕후와, 정조의 아버지 사도세자의 죽음을 당연시하는 벽파세력에게는 좋은 기회였다. 그러므로 그들은 남인과 사도세자의 죽음을 안타까워하던 시파에 관련된 인물들을 제거하기에 이르렀다.   1801년 정월 19일에 책롱사건이 터졌다. 책롱사건은 다산의 형 정약종이 정조가 세상을 떠남에 정세가 불리해질 것을 알고, 자신이 보관하고 있던 천주교 교리서와 천주교 도화, 신부의 편지 등을 고리짝에 넣어 친구 집에 보냈는데, 친구가 불안하게 여겨 다시 되돌려 주려다가 의심받아 조사하는 과정에서 상자의 내용물이 발각되어 포도청에서 의금부로 이관되어 중요한 국사범으로 심문이 시작되어 이가환, 정약용, 이승훈, 홍낙민이 잡히고 벽해사건이 점차로 심화되어 그 결과 이승훈, 정약종, 최필공, 홍교만, 최창현, 이존창 등 천주교도 300여 명이 사형당하고, 정약전, 정약용 등은 유배된 사건이다.   다산이 포항 장기로 유배가 결정된 것은 1801년 2월 27일이다. 그 이튿날 길을 떠나 한강 남쪽 사평을 거쳐 석우촌에서 마지막으로 가족과 이별하고, 그 다음으로 충주 하담의 선영에 들렀다가 탄금대를 지나 조령(鳥嶺)을 넘어 문경 함창을 거쳐 장기 땅에 도착한 것은 3월 9일이었다.다산은 경주부윤에게 인계되었다가, 다시 장기현감에게 인계되었다.장기에 도착한 다산은 이튿날 관리에게 이끌려 늙은 포교 성선봉(成善封)의 집에서 유배생활을 시작했다.다산이 귀양 살던 집 주인 성선봉은 마음이 착하고 부지런한 사람이었다. 다산을 위해 술병을 들고 와서 술을 권하기도 하고 외출을 권하기도 했다. 귀양 온 죄인이라 외출 범위는 한정되었지만, 임중 숲을 산책하며 들길과 냇가를 따라 3리에 있는 신창 바닷가를 나간 적도 있었다고 한다. 이때 어부들의 고기 잡는 모습을 보니 어설픈 그물망으로 걸려든 고기는 많으나 어획을 얻지 못한 것을 매우 안타까이 여기고는, 그물망을 명주실로 만들면 어획량을 늘일 수 있다고 말해 주었다. 이에 어부들이 명주실로 그물을 만들어 많은 고기를 잡게 되자 이 소문이 퍼져 경주 일대는 명주실 값이 올라 지역경제의 혼란을 가져왔다고, 장기현감이 장계를 올려 다산이 다시 서울로 압송되었다고 전해진다.   그러나 다산은 1801년 3월에서 10월까지 약 200일간 장기에서 유배생활을 하면서도 지방 백성을 생각하는 애민정신은 변하지 않았으며, 문학과 학문에 대한 열정도 다름없었다.짧은 장기 유배생활 동안 《기해방례변(己亥邦禮辨)》, 《삼창고훈(三倉詁訓)》, 《이아술(爾雅述)》 등 6권의 책을 저술하였고, 자신의 귀양살이 하는 심경과 변방의 장기 고을에 대한 풍물의 시(詩) 180여 수를 지었으니, 그의 학문적 열정을 엿볼 수 있다. 그 후 다산은 다시 투옥되고 전라도 강진으로 유배되었다.   장기로 유배 올 때 석우촌에서 이별하며 지은 <석우별>(石隅別, 석우촌은 숭례문 3리 거리에 있는 마을) 詩를 소개한다. 쓸쓸한 석우촌에서/ 가야 할 길 세 갈래로 갈리었네/ 머리 맞대며 장난치며/울어대는 두 마리 말/ 어디로 가야할지 모른다네//한 마리는 남쪽으로 가야할 말/ 한 마리는 동쪽으로 달려야 할 말/제부(諸父) 제형(諸兄)들 머리와 수염/ 하얗고, 큰 형님은 눈물 턱에 고//젊은이야 다시 만날 수 있겠으나/ 노인네들 일이야 그 누가 알랴/ 조금만 더 조금만 더 하다가/ 해는 이미 서산에 기운다//다시는 돌아보지 말아요/ 애써 다시 만날 날 기약하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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