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상매일신문=성낙성기자] 3·1독립만세운동과 임시정부 100주년을 맞는, 3월 1일의 뜻 깊음에 따라, 일본의 양심이 깊게 새겨들어야할 일이 있다. 독일 함부르크 로텐바움박물관은 서울 종로구 인사동에서 36년 전 불법 반출된 뒤, 독일박물관의 소장 문화재인, 조선 시대 문인석 한 쌍을 한국으로 돌려보내기로 결정했다. 독일 박물관이 유물 소장 경위를 확인하는 과정에서, 불법성을 파악한 뒤, 자진해서 돌려주는 사례이다. 문화재 환수의 모범적 사례로 기록될 것이다. 이와는 정반대로 일제강점기에 일본이 강탈하거나 도굴하는 방법 등으로 가져간, 우리 문화재가 문화재의 조국이 아닌, 동토(凍土)의 땅에서 아직까지 한국으로 갈 날을 기다린다. 일본은 수단방법을 가리지 않고, 가져간, 대표적인 것이, 바로 ‘오구라컬렉션’이다. 이름이 좋아 컬렉션이지, 강탈이나 도굴의 그 자체였다. 일본 도쿄국립박물관 동양관 한국실에 소재한 문화재의 절반이 오쿠라컬렉션이다. 오구라컬렉션은 오구라 다케노스케(小倉武之助,1870–1964)가 한국에서 반출해갔다. 한국문화재 약탈의 3대장은 ‘오구라 다케노스케’,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 ‘가루베 지온’(輕部慈恩)이다. 오구라 다케노스케는 ‘문화재 도굴의 왕’이라고 불렸을 정도이다. 1964년 한국 언론 인터뷰에 따르면, 오구라 다케노스케는 수집한 문화재 5천여 점 중에 8할을 대구에 두고 온 것이 아쉽다고, 오히려 자기가 반환받고 싶다고 말했다. 2015년 도쿄지방재판소 행정 소송에 따르면, 재판부는 한일협정으로 타결된 문제이므로 반환 의무가 없다는 도쿄국립박물관의 주장을 인용해, 청구를 각하했다. 1981년 오구라의 아들이 도쿄국립박물관에 기증할 당시, 한국문화재 수량은 1,030여건이었다. 부산 연산동 고분군 출토품은 1931년 도굴된 이후, 도굴꾼들에 의해 밀거래됐다. 금관총 유물은 어느 시점에 오구라의 소장품이 됐다. 오구라 다케노스케는 경부철도 대구출장소의 경리주임이었다. 일본으로 건너간 그는 가난한 사람들을 이용한 고리대, 부동산업 등을 시작하며, 막대한 부를 축적했다. 자신의 부를 이용하여 1921년부터 한반도에 걸친, 광대한 문화재를 수집했다. 단순한 문화재 수집에서 벗어나, 약탈·도굴까지 동반한 방법이었다. 한반도에 존재하던 엄청난 양의 문화재들을 자신의 개인 수집품으로 삼았다. 1905년 러일전쟁 때, 일본군은 함북 길주에 있던 북관대첩비(北關大捷碑)를 도쿄로 강탈했다. 이 비는 1592년 임진왜란 당시 조선의 의병장 정문부(鄭文孚, 1565∼1624)가 왜군을 물리친 내용을 기록한 것이다. 지금은 야스쿠니(靖國)신사의 외진 곳에 방치되어 있다. 현재 우리 문화재가 일본으로부터, 안전하게 우리 조국의 품에 있는 것은, 거의 간송(澗松) 전형필(全鎣弼, 1906년 ~1962년 ) 선생이 우리 문화재를 정당하게 평가하고 구입한 것들이다. 1940년 간송 전형필이 훈민정음 해례본을 당시로써는 기와집 10채 값인 1만원을 주고 구입했다. 간송은 값으로 매길 수 없다는 무가지보(無價之寶)로 꼽힌, 훈민정음 해례본은 신주단지였다. 한국전쟁이 일어나자, 이 훈민정음 해례본을 품에 간직한 채 피난을 떠났다. 잠 잘 때도 베개 속에 넣어, 끝끝내 지켜냈다. 1956년 후학들의 연구를 위해, 한 장 한 장 사진을 찍어 영인본으로 공개했다. 겸재(謙齋) 정선(鄭敾) 21폭 화첩은 친일파 송병준의 머슴이 불쏘시개로 쓰려던 것을 간신히 살려냈다. 간송 선생은 스스로 보화각(葆華閣)을 짓고, 평생에 걸쳐 수집한 문화재를 수장했다. 이게 오늘날 간송미술관의 전신이다. 3·1만세운동과 임시정부 100주년 행사도 유의미하나, ‘오쿠라컬렉션’부터, 조국의 품으로 되찾는 것은 한민족의 자존심이 걸린 문제로써, 진정한 100주년을 맞는 후손들의 할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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