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8년 전인 지난 1968년 11월 2일. 분단국가이기에 겪었던 아픔으로 역사의 뇌리속에 영원히 지워지지 않는 울진·삼척 무장공비 침투사건은 당시 공비들의 잔인한 만행을 가슴속에 묻고 살아가는 사람들이 있다.당시 정부의 이주정책으로 마을을 떠났다가 48년째 고향을 등지고 살아가고 있는 울진군 북면 주인3리 속칭 ‘절골’ 주민들이 주인공들이다.더구나 민족상잔의 비극인 6.25를 직접 겪은 전쟁세대들에겐 기억조차 하기 싫은 아픔을 간직하고 있다.공비들을 피해 함께 이주하여 왔던 이웃들이 하나 둘씩 유명을 달리하거나 타향 객지로 떠난 현실에서는 더욱 그러하다.날로 번창해가는 울진의 명소인 한울원진이 위치한 인근 북면 주인3리 절골마을...햇살이 본격적으로 따가와지고 온 산하가 푸른빛으로 물든 여느 산골처럼 생각하기도 싫은 추억을 간직하며 살아가고 있다.1968년 11월 2일 새벽, 경북 울진군과 강원도 삼척시의 경계지점인 북면 고포마을 앞바다로 침투한 무장공비 120여명 중 30여 명이 등산복과 신사복으로 변장하고 약 20km쯤 떨어진 산 속인 고수골로 잠입했다.이들은 “면사무소에서 주민증 발급용 사진을 찍으러 나왔다”며 아침 일찍부터 인근 죽변시장을 보러간 전영옥(여·91)씨 일가를 제외한 나머지 주민들이 모두 모이자 드디어 본색을 드러내기 시작했다.어느새 북한 군복과 기관단총,수류탄 등으로 무장한 공비들은 사상교육을 시키며 노동당 입당을 강요했다.오정옥(1990년 사망) 씨 집에서 5시간 가량 사상교육을 하던 공비들은 점심 무렵이 되자 마을 남자 7명을 데리고 덕구온천 쪽인 매봉산으로 향했고 ‘흰목이 고개’에 이르자 사상교육에 불충실했다는 이유로, 당시 강원도 태백에서 광산에서 광부일을 하다가 잠시 고향에 다니러 온 전병두(당시 31세) 씨를 즉석 인민재판에 회부해 사살했다.그때 객지 생활을 하며 세상돌아가는 이치에 밝았던 전씨는 오전 동안 북한 김일성 체제와 공산주의 사상의 허구성에 조목조목 비판했다는 이유에서다.같은날 또 무고한 주민이 희생됐다. 우편배달을 위해 고개를 넘어오던 강태희(당시 37세) 씨도 우편국 제복 탓에 경찰로 오인해 사살한 것.그 사이에 마을에 남아있던 주민들은 릴레이식으로 신고를 시작했다. 결혼하면서 고수골을 떠나 인근 탑골에 살던 최만식 씨에게, 김준하(1982년 작고) 씨가 찾아와 공비의 출현을 알렸고 최 씨는 경찰지서가 있는 부구리를 향해 달리기 시작했다.숨이 턱까지 차오를 때쯤 최 씨는 후들거리는 다리를 이끌고 부구지서에 도착했을 때에는 이미 경찰에는 비상이 걸린 상태였다.임원승(80) 씨는 “마을로 들어온 국군도 다짜고짜 ‘빨리 아랫마을 절골로 내려가라’면서 콩가리와 수수덤불에 모조리 불 질러 버려 무서웠다”며 당시를 회상했다.이같은 주민들의 신고 정신 덕분에 공비 30여 명(다른지역 침투 83명, ‘나는 공산당이 싫어요!`로 유명했던 이승복 군)은 사살되고 울진·삼척 무장공비 사건은 막을 내렸지만 고수골과 탑골 주민들의 실향 생활은 이때부터 시작됐다.출동한 군경에 의해 곳곳에 흩어져 살던 주민들은 5km 떨어진 아랫마을 절골로 집단으로 이주시켰다.아! 이들은 세상 속에 있지만 세상 밖에서 살고 있는 것은 아닐까? 이들의 가슴속에 아직도 전쟁의 상흔이, 공비 소탕전이 전개되고 있는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이데올로기로 인한 동족상잔의 비극, 분단국가이기에 선량한 주민들의 의사와는 상관없이 발생한 울진·삼척 무장공비 침투사건은 숱한 양민이 학살되는 한국현대사의 아픈 기억으로 남아있다.이제는 고수골이나 탑골에 가도 이들의 고향은 없다.오랜 세월 동안 사람들의 발길이 닿지않아 고수골로 들어가는 길은 갈대 숲 사이로 군데군데 남아 있는 주춧돌과 주민들의 터전인 감나무들만이 역사 속의 뒤안길에서 묵묵히 오늘도 고향을 지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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