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1km의 해안선을 보유하고 있는 울진군, 바닷가에 살면서 어업으로 생계를 꾸려온 울진지역 어업인들은 해마다 입동(立冬) 무렵이면 미역 포자가 잘 붙도록 하기 위해 조간대(潮間帶)에 자리 잡고 있는 미역바위를 정성을 들여 닦았다.조간대는 만조(滿朝)때면 바닷물에 잠겼다가 간조(干潮)때면 물 밖으로 드러나는 해안선 사이 부분으로 보통 물속 1.5~2m 정도에 이르고 있다.이 조간대는 대부분의 생물들에게 혹독한 환경이되지만 오히려 자연의 신선한 바람과 햇볕을 적당하게 받을 수 있어 미역이 성장하는 데는 최고의 환경이 됐다.어업인들은 또 매년 10월 보름이면 춘궁기(春窮期)와 추궁기(秋窮期)에 생명을 부지해주는 중요한 식량이자, 삶을 담보해주는 생명줄이던 미역 풍년을 빌면서 ‘짬고사’를 지냈다. 일명 기세닦기로 부리는 미역바위를 닦는 작업은 짬에 붙어 있는 잡초와 오물을 깨끗하게 제거해줌으로써 미역 포자가 잘 붙도록 해 더 많은 미역을 생산하기 위한 것이다.기세 닦기는 동네 어촌계별 품앗시로 좋은날을 잡아서 ‘낫대’와 ‘씰개’라는 연장을 이용해 이루어졌다.‘낫대’는 괭이를 곧게 펴놓은 형태를 하고 있어 웃자란 해초를 벨 때나 짬에 촘촘하게 박혀서 자라는 해초, 홍합, 따가비 등을 제거할 때 사용되는 도구이다.‘씰개’ 또한 괭이를 곧게 펴놓은 형태를 하고 있지만,끝이 뭉툭해서 미역짬에 붙은 온갖 이끼류의 해초를 긁어내거나 홍합 등을 깨부숴서 떨어뜨릴 때 유용하게 쓰인다.이러한 작업을 거쳐 이듬해 봄에 생산되는 미역은 마을공동의 재산으로 마을 주민들이 공평하게 나누었고, 일부는 마을공동 운영기금으로 적립했다.울진 바닷가 마을에서 생산되고 우수한 품질의 미역은 당시 울진과 봉화지역의 물화(物貨)를 장시(場市)를 통해 연결되던 보부상인 바지게꾼들이 지게에 실려 십이령(十二領)고갯길을 넘어서 내륙 곳곳으로 팔려 나갔다.언제부터인가 짬고사는 더 이상 지역에서 찾아보기 어렵게 됐지만, 오랜 시간 이어져온 기세닦기는 울진군 해양수산과의 예산 지원까지 받아가면서 계속 이어지고 있다.40여 년 전의 미역바위 딲기 작업은 현재의 형태와 별로 달라 보이지는 않았다.그러나 낫대와 씰개를 이용해 미역짬을 닦아내는 어업인들 사이를 오가며 작업하는 ‘뗏마(덴마)’선은 이색적인 광경으로 눈길을 끌었다.노(櫓)를 사용해 전후좌우로 이동하는 소형 목선 전마선(傳馬船)인 뎃마는 지금은 좀처럼 구경하기 힘든 작업도구인 배 였다.1930년대에서 1970년 초에 이르기까지 ‘보리고개’가 기승을 부리던 시절, 미역은 어민들은 물론 울진인을 살려준 소중한 먹거리였다.“미역이 없었으면 울진사람 모두 다 죽었지”라는 향언이 지금까지 전승되고 있듯이 미역은 울진사람들의 생존을 지켜준 버팀목이었다.울진군은 올해 1억 2천만 원의 예산을 들여 연안어장 1천255ha에 이르는 ‘미역짬’에 대한 미역바위닦기 사업에 나설 방침이다.여기네는 울진군 북면 고포마을에서 후포면 금음4리 어촌계까지 32개 어촌계에서 2천여 명이 참여한다.울진 돌미역이 한창 출하되는 시기는 3월에서 5월사이로 이 무렵 태백산맥을 넘어 동해로 불어오는 ‘높새바람’은 때깔좋은 미역을 건조시키는데 필수적인 조건을 갖추고 있다.지난해 봄 울진산 미역,특히 울진군 북면과 죽변면 일대에서 생산되는 ‘고포미역’은 스무 올 기준으로 한 단에 20만 원을 넘게 거래됐다.옛날 임금님에게 진상했다는 질 좋은 고포미역은 해마다 3~5월경이면 울진군 북면 나곡6리 고포마을에는 울진산 돌미역을 구하려는 사람들의 발길이 줄을 잇고 있다.울진군은 ‘울진 고포미역’을 특산품으로 지정해 생상기반 조성에서부터 포장, 유통에 이르기까지 예산지원과 함께 각별한 관심을 기울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