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비에서 여초현상이 일어났단다. 여성들의 평균수명이 남성보다 늘어났기 때문이라는 분석이 나온 기사를 본다. 평균수명이 늘어나는 것도 물론 중요하지만 실질적으로는 빈곤의 여성화도 빠르게 현재진행중이다. 그러나 오늘은 가난하고, 고독하고, 길고, 남루한 노년에 대한 논의는 뒤로 하고 불과 일주일전과 사흘 전의 경험 두 가지를 소개하면서 아름다운 노년을 이야기하고 싶다. # 1 라오스를 다녀왔다. 홍콩과 마카오를 짧게 다녀온 것만으로는 여름방학을 충분히 즐기지 못한 아쉬움에 덜컥 라오스행을 결심했다. 여행지에 대한 기본적인 사전정보나 공부는 일부러 하지 않았다. 예능 프로그램에 환상적으로 소개되었다는 정도만 알고 가는 것이 오히려 여행의 묘미를 배가시켜 주리라는 무모한 확신까지 가지면서. 그러나 여행의 묘미를 배가시켜준 것은 전혀 예상하지 못한 엉뚱한 면에서 발견되었다. 꽃보다 청춘에서 보여준 풍광, 레포츠, 먹거리 등이 아니라 여행팀의 일원인 할머니 한 분이었다. 향년 83세. 경남의 소도시에서 살고 계신다. 상당히 왜소한 체구에 잰 걸음걸이, 도통 말씀이 없는 조용한 성격의 할머니다. 세 명의 딸들과 사위들이 할머니를 모시고 라오스 여행을 온 거다. ‘고령의 할머니를 어떻게 모시려고 이 더운 곳까지 왔을까’ 저절로 걱정이 되었지만 본격적인 투어가 시작되자, 걱정은 곧 놀라움과 감동으로 교체되었다. 다들 “늙으면 입은 닫고 지갑은 열어라”는 말을 농담 삼아 한다. 주변사람들에게 그나마 인정이라도 받고 싶으면 늙은이 특유의 잔소리는 하지 말되, 후하게 인심을 써야한다는 뜻이다. 그러나 라오스의 그 할머니는 입도 닫고, 지갑도 닫았지만 여행 내내 26명의 일행 모두에게 비슷한 내용의 감동을 주었다. 11개의 짐 라인 코스도, 수중동굴 탐험도, 비포장 길의 심하게 덜컹거리는 트럭도 거침없이 그러나 너무나 조용히 즐기는 그 모습은 일행 모두에게 신기함과 감동, 나아가 아름다운 노년의 모습을 기획하게 만드는 계기가 되었으리라 짐작된다. “줄 타고 내려오는 것은 안 무서워요. 나무꼭대기로 올라가는 계단이 무서워서 그렇지...” 그러나 힘들었던 투어를 영웅담처럼 늘어놓은 것은 정작 할머니의 딸들이다. 우리 어머니가 작년에는 태왕산을 올랐고, 그 전에는 어디를 갔는데 우리보다 더 잘 잡숫고, 잘 걸으셨다는 등의 얘기들이다. 투정과 어리광, 끊임없이 관심 받고자 하는 노년의 숨겨진 속성과는 거리가 한참 먼 할머니다. 도리어 고령의 당신 때문에 여행팀이 불편할까 `내게는 신경 쓰지 마세요`가 느껴질 정도로 말씀 하나, 행동하나 하나를 있는 듯, 없는 듯이 하셨다. 그리고 시간이 흐르면서 우리 모두는 정말 그 할머니를 신경 쓰지 않아도 편안해졌다. #2 2학기가 시작되었다. 개강 첫 날, 오리엔테이션에서 수강인원을 완벽하게 채워준 학생들에게는 미안한 일이지만 사실상 질 높은 수업을 하기엔 인원이 부담스러웠다. 그렇기 때문에 의도적으로 강좌에 대한 부담을 힘껏 주어 결국 10여 명의 학생들이 수강포기를 하게 만들어 한결 가벼운 발걸음으로 둘째 주, 첫 수업에 들어갔다. 강의실을 채운 학생들의 면면을 주~욱 둘러보다가 띠~웅.... 백발의 할머니 한 분이 앞 줄 세 번째 줄에 계셨다. 순간적으로 몹시 당황했지만 모르는 척 1교시 수업을 마치고 쉬는 시간 할머니께로 다가갔다. 수업을 듣는 학생인지부터 여쭈었다. 동양화전공 3학년이시란다. 과제도 중간, 기말시험도 다 하실 수 있냐고 조심스럽게 여쭈었더니 “선생님, 특별대우 하지 마세요. 저 열심히 할게요. 컴퓨터 자판이 느리지만 안 되면 손으로 써서라도 과제할 수 있어요.”... “아, 그러세요? 예. 예. 감사합니다...” 그런데도 교탁으로 돌아와 출석부에 살짝 표시를 해놓았다 ‘특별대우하지 말라 당부했는데 내가 하는 이 표시는 뭐지?’ ‘아, 그런데 연세는 얼마일까’라는 생각을 동시에 하면서. 그렇게 2교시, 3교시 수업을 마쳤다. 지난 수년간 수업을 하면서도 단 한 번도 준비해 간 강의 자료를 다 마치지 않은 일이 없었는데 이 날은 준비해 간 자료의 절반만으로도 수업시간이 모자랐다. 할머니를 의식해서 더 차근차근 설명하느라 시간을 뺏긴 것이었다. 정작 당신은 특별대우를 바라지 않는다는데 노인이니까 쉽게 이해를 못할 것이라는 선입견을 왜 미리 가졌을까? 오히려 삶의 경험이 풍부하므로 이해는 더 쉬울 수 있다는 생각은 왜 못한 것일까? 자책하면서 집으로 왔다. 하지만 수업 내내 가슴 저 밑바닥에서부터 올라오는 따뜻한 기운에 무척이나 행복했다. 내가 가르치는 것이 아니라 할머니로부터 더 많이 배우게 되리라는 즐겁고 따뜻한 예감들이 나를 꽉 채워 준 것이다. 뒤늦게 조교가 살짝 알려준 할머니의 연세는 73세다. 약간 창백한 얼굴색이지만 건강해 보였다. 아직은 수업 중 예술가들을 언급할 때, 가부장제를 언급할 때 고개를 크게 끄덕이셨다는 정도의 기억밖에는 안 남았지만 다음 주 수업 후에는 더 많은 기억들이 보태어 질 것이고, 그 기억들로 우리는 서로에게 선생님과 학생이 번갈아 될 것이다. 아마도 종강 무렵에는 할머니와 나눈 한 학기의 경험들로 이 지면을 다시 채울 수 있으리라는 기대도 함께 한다. 음.... 그래. 꽃보다 할매!다. 할머니들 만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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