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은 이성계가 건국했지만 그는 형식적 시조였다. 실질적 시조는 정도전이라는 평가가 나온다. 조선 건국의 이념은 정도전에게서 나왔다. `조선경국전`과 한양으로의 천도, 궁궐의 건설, 도로의 구조, 사대문 안의 지명들은 모두 정도전이 창안한 것이었다.
한 고조 유방이 신하 장량을 쓴 게 아니라 장량이 유방을 쓴 것이라는 고사처럼 정도전에게는 이성계가 정도전을 쓴 게 아니라 자신이 이성계를 쓴 것이었다.
왕자 이방원이 이런 정도전을 반드시 해치워야 할 대상으로 생각한 것은 무리가 아니었다. 혁명가인 정도전에게도 왕권 중심주의자인 이방원은 큰 위협이었다. 때문에 정도전은 이방원이 후계자가 되는 것을 적극적으로 경계했다.
조선 건국이라는 대업을 위해 손을 잡은 사이였지만 정도전은 결국 이방원의 칼에 죽음을 맞는다. 거칠 것 없는 정도전과 그의 라이벌 이방원을 각각 조명한 책이 최근 잇따라 출간됐다.
드라마 `불멸의 이순신`의 원작자로 잘 알려진 소설가 김탁환 씨는 조선의 설계자 정도전을 담은 `혁명, 광활한 인간 정도전`(전 2권·민음사 펴냄)을 냈다. 위화도 회군 후 이성계가 사냥 중 낙마해 힘의 공백이 생기고, 정몽주가 살해되기까지 18일의 비망록이다.
저자가 그리는 정도전은 백성을 위한 나라를 열망했고, 목숨이 다하는 순간까지 초심을 잃지 않은 인물이다.
"우리의 목표는 용상의 주인을 갈아치우는 것이 아니라 변혁의 기운이 이 작은 시골에까지 두루 미치는 것, 그리하여 어제와는 다른 오늘, 오늘과는 다른 내일을 이곳 백성이 느끼도록 만드는 것이었다."(1권 130쪽)
정도전은 지금껏 수많은 논저와 작품에서 다뤄졌지만 혁명가의 일상에 관한 세밀한 묘사와 영혼에 대한 깊은 탐색은 부족했다는 것이 저자의 판단이다. 그래서 저자는 정도전의 삶과 죽음에 대한 객관적인 기록보다는 민본주의, 부국강병의 의지 속에 감춰진 그의 내밀한 번민과 고독에 주목한다.
이 책은 민음사와 김탁환 작가가 새롭게 기획한 `소설 조선왕조실록`의 첫 작품이다. `소설 조선왕조실록`은 조선 500년을 총 60여 권의 소설로 재구성할 예정이다.
`혁명, 광활한 인간 정도전`의 대척점에 선 것은 역사소설가 이수광 씨가 쓴 `조선국왕 이방원`(혼미디어 펴냄)이다. 이 책은 제목에서 짐작되듯 이방원의 시각으로 고려 패망과 조선 건국이라는 광풍의 중심부를 응시한다.
그렇다고 해서 정도전을 없앤 이방원을 옹호하고 그에게 면죄부를 부여하는 책은 아니다. 저자는 둘의 차이점보다는 공통점에 주목한다. 이방원과 정도전은 사상적 틀은 달랐지만 백성을 위하는 길이라는 바탕은 같았다고 저자는 말한다.
"`조선을 강한 나라로 만들 것이다. 정도전의 조선경국전에 따라 나라를 다스릴 것이다.` 이방원은 정도전을 죽인 일이 가장 아쉬웠다. 그와 손을 잡았다면 요동 정벌도 가능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이방원에게 등을 돌려 죽음을 당했다. 다른 길을 가려고 했기 때문에 죽일 수밖에 없었다."(290쪽)
이와 함께 1997년 출간돼 정도전에 대한 대중적 관심을 촉발시킨 조유식 씨의 `정도전을 위한 변명`(휴머니스트 펴냄)도 다시 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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