친일파 지식인 윤치호(1865~1945)가 자필로 애국가 가사를 적은 문서 가운데 유일하게 현존하는 문서가 1945년 8월 광복 직후 작성된 것으로 확인됐다. 민주당 안민석 의원은 31일(현지시간) 문화재 환수 추진 단체인 `문화재 제자리 찾기`의 혜문 스님과 함께 미국 에모리대 도서관을 방문, 윤치호의 애국가 가사 친필본의 존재를 확인했다. 윤치호가 애국가 원작자라고 주장하는 측에서는 에모리대에 보관된 친필본을 윤치호가 1907년 애국가를 작사한 증거 중 하나로 내세우고 있다. 에모리대가 이날 안 의원과 혜문 스님에게 공개한 친필본의 앞면에는 애국가 가사와 `1907년 윤치호 작사`라는 서명이, 뒷면에는 `1945년 9월 아버지(윤치호)께 친히 써주신 것. (딸) 문희`라는 글이 각각 적혀 있었다. 에모리대는 1997년 윤치호의 후손으로부터 친필본을 기증받고 도서관 귀중본 서고에 보관해왔다. 그러나 안 의원 등은 친필본이 광복 한 달 뒤에 작성됐다는 점에서 이 문서가 윤치호의 애국가 작사설을 뒷받침하는 근거로 삼긴 어렵다는 의견을 밝혔다. 안 의원은 "윤치호가 친필본을 쓴 시기가 애초 알려진 1945년 10월이 아닌 9월이란 사실에 주목한다"며 "보름 정도 해방 정국의 추이를 지켜보다가 친일이 아니라 애국가를 작사해 항일과 독립운동에 기여했다는 흔적을 남기고 싶었을 것이고, 그래서 바뀐 세상에서 부랴부랴 애국가 작사를 남긴 것으로 짐작한다"고 주장했다. 그는 "해방 정국의 한 달 차이는 어마어마한 역사적인 차이가 있는데, 아마도 친일했던 윤치호 측에서 상당한 위기감을 느꼈을 것"이라고 추정했다. 친필본을 함께 열람한 김준혁 경희대 교수는 "윤치호의 친필본이라는 것이 왜 써졌느냐는 의도를 살펴볼 필요가 있다"며 "1945년 9월에 남긴 것이 친일의 흔적을 없애려는 의도라면 그것이 갖고 있는 가치를 높이 평가할 수 없다"고 말했다. 안 의원은 이와 함께 "친필본이 본래 윤치호의 필적과 동일한 것으로 알려졌지만 `두 필체가 같다고 확인된 적이 없다`는 대학 관계자의 진술이 있다"며 "앞으로 이를 분명하게 확인할 필요가 있다"고 지적했다. 앞서 진저 스미스 도서관 대외협력국장은 지난 17일 기자회견에서 "1945년도 친필본이 윤치호가 쓴 것인지는 복수의 검증(double check)을 거쳐 사실로 확인됐다"고 밝힌 바 있다. 스미스 국장은 휴가를 이유로 열람 자리에 불참했다. 혜문 스님은 안 의원과 김 교수와 달리 친필본이 애국가 원작자를 규명하는 데 중요한 사료가 될 수 있다는 견해를 피력했다. 그는 "친필 원본의 서지(書誌)를 확인한 것에 가장 큰 의미가 있다"며 "이제는 여러 경로를 거쳐 과연 이것이 윤치호가 썼는지를 검증하고 애국가 작사가를 확정하는 후속 조치가 뒤따라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혜문 스님이 이끄는 `문화재 제자리 찾기`는 에모리대 친필본을 근거로 윤치호가 원작자라는 데 무게를 두고 최근 `친필본 환수 모금 운동`에 들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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