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텐베르크의 금속활자 개발은 서구 사회의 지식 전파와 유통에 일대 혁명을 일으킨 사건이었다. 성경 등 인쇄물의 대량 생산과 신속한 보급은 소수의 지식 독점체제를 무너뜨리고 서양 근대의 문을 활짝 열었다. 반면 지구상에서 가장 먼저 금속활자를 만들었다는 한국의 모습은 달랐다. 인쇄물의 대량 생산이라는 금속활자의 본디 의미와 달리 조선의 금속활자는 국가 소유물이었고, 민간에 지식을 확산하는 용도와는 거리가 멀었다. `세계 최고(最古)`라는 민족적 자부심에 파묻히면 쉽사리 포착하기 어려운 역사의 틈새에 강명관 부산대 한문학과 교수가 과감히 확대경을 들이댔다. 그의 신간 `조선시대 책과 지식의 역사`는 조선시대 책과 지식이 어떤 생산-유통-소비 과정을 거쳤는지 살펴보고, 이를 단서로 조선 역사를 새롭게 읽어내려 한 책이다. 철저히 `책과 지식` 그 자체에 집중한 이 책은 `학문이 발달한 찬란한 역사` 따위를 조명하지는 않는다. 오히려 `그런 조건이 갖춰져 있었는데도 왜 이 정도밖에 안 됐을까`라는 질문을 계속해서 던지며 독자와 함께 답을 찾아나간다. 물리적 조건만 따지면 조선은 전사회적 지식 보급에 상당히 좋은 조건을 갖추고 있었다. 인쇄물의 대량 생산과 보급을 가능케 하는 금속활자, 배우고 쓰기 쉬운 세계 최고 수준의 문자 한글은 지식사회를 위한 `환상의 조합`이었다. 그러나 그 결합은 제대로 이뤄지지 않았다. 당시 인쇄물은 대부분 소수 특권층이나 이해할 수 있는 한문으로 쓰였다. 한글 활자는 한문으로 된 책을 국문으로 풀이한 언해본을 인쇄할 때 주로 사용된 정도였다. 강 교수는 또 금속활자 인쇄가 민간에 급속도로 확산한 서양과 달리 조선은 금속활자를 국가가 독점하면서 오히려 중세 질서를 고착화하는 방향으로 나아갔다고 지적한다. 이는 국가가 지식의 공급처이자 유통 주체라는 뜻으로, 극소수 지배세력의 체제 유지에 도움이 될 만한 책만 찍어냈다는 것이 그의 분석이다. 아울러 당시 책값이 우리의 상상 이상으로 비쌌고, 인쇄·출판을 국가가 독점하면서 서점이 발달하지 못했다는 지식 생산·유통구조상의 한계도 드러난다. 다만 저자는 이처럼 서적의 인쇄·출판·보급에 국가적 차원에서 의미를 부여하고 인쇄기관과 인쇄술을 갖춘 나라가 중국을 빼면 거의 없었다는 점에서 조선의 서적 문화 자체는 매우 우수한 편이었다고 평가한다. 천년의상상. 548쪽. 2만5천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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