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문학은 사망선고(死亡宣告)를 받았는가. 아니면 현재 사망선고가 집행유예상태인가를 물어야겠다. 또한 인문학이 아예 없는가도 물어봐야 할 때인가. 여기에서 인문학의 무덤이 어디에 있는가도 지금 생각을 해봐야겠다. 다시 생각을 해보면, 도대체 인문학이란 무엇인가도 되새겨 봐야겠다. 인문학은 사람에 대한 학문이다. 그럼, 인문학을 논할 때에는 사람을 생각하는데서 출발해야 한다. 그렇다면, 사람이 존재하는 한 인문학은 현재 진행행으로 지금도 숨을 쉬고 있다고 본다. 현재도 사람이 살고 있기 때문이다. 과거 중세시대에는 지금과 같이 학문의 분파가 여러 갈래로 쪼개져 있지가 않았다. 그러나 근대로 들어오면서 학문은 현재처럼 분파로 갈라지기 비롯했다. 그래서 다 같은 분야를 전공하면서도 대화가 되지 못하는 상태로 갔다. 예를 들어 다 같은 경제학을 하면서도 서로 대화가 되지 않는다. 서로가 담을 높게 쌓고서 대화는커녕 남처럼 살고 있는 판이다. 그러나 그렇지가 않은 사례도 있다. 저명한 스티브 잡스는 철학을 전공했다. 그의 철학이 휴대폰이라는 현대의 기기를 생산했다. 철학이 첨단과학의 집합체인 아이폰을 낳았다. 인문학의 왕좌(王座) 철학이 현대 문명의 자궁(子宮)이 된 것이다. 잡스가 아이폰을 들고서 한 말은 이것은 ‘철학과 예술’이 집합체라고 했다. 철학이 우리가 일상으로 사용하는 과학을 낳은 것이다. 이를 다시 말한다면, 철학과 예술의 집합체라고 한 것은 바로 사람의 상상력(想像力)이다. 사람의 가장 큰 특징은 바로 상상력이다. 상상을 할 줄을 모른다면, 그는 결코 사람의 가장 큰 특징인 상상력이 없기에 사람으로서의 제 역할을 다하지 못하여, 사람으로서 그 어딘가가 조금은 부족하다고 말을 해도 좋다고 여긴다. 그럼 더 나은 상상력은 도대체가 어디에서 나오는가. 바로 독서(讀書)에 달려 있다. 독서를 하려면 책(冊)부터 있어야 한다. 책이 없다면, 독서를 하려고해도 읽을 감이 없다. 책은 어디에서 생산되는가. 사람에서다. 사람이라면, 우리이다. 우리가 책을 쓰고 있다. 쓰는 사람이 없어, 책이 없다면 따라서 ‘사람 인문학’도 없다. 그래서 ‘사람에 관한 모든 것’이 책이 된다. 그렇다면, 책은 사람에 관한 모든 것에서 사람의 눈 밖에서 벗어날 수가 없다. 사람이 바로 그 자체가 살아 있는 인문학이다. 지금도 책이 생산된다고는 하지만 읽지를 않는다면, 책이 없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책을 읽는다는 것을 다른 말로 하면, 접촉(接觸)이다. 그러나 지금은 접촉의 시대가 아니고 접속(接續)의 시대이다. 예전에는 모르는 것이 있다면, 우선 책을 찾았다. 이게 접촉이다. 그러나 이제는 아니다. 컴퓨터에 접속하여 찾는다. 그러니 독서가 아닌 컴퓨터를 켜서 접속하면, 그 어떤 것이라도 바로 나온다. 독서가 필요 없는 시대이다. 이게 바로 인문학의 사망선고이다. 그럼에도 책이 계속해서 생산되는 것이 그 집행이 유예도 되고 있다고 하겠다. 사망선고를 받은 인문학의 부활을 꿈을 꿀 수가 있다. 이제부터 인문학의 부활을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되는가. 인문학이 ‘사람과의 관계성’이라면, 사람의 상상력이 낳은 책을 읽어야 한다. 공자(孔子)는 주역(周易)을 좋아해 하도 여러 번 읽어 위편삼절(韋編三絶)이 되었다고 한다. 위편삼절이 공자되기에 성공했다고 볼 수가 있다. 공자의 논어에 아는 것보다 좋아하는 것이 낫고 이보다는 즐기는 것이 더 좋다는 말이 있다. 요즘 말로 하면, 컴퓨터와의 접속이 아니고 책과의 접촉이다. 접촉이되, 융합·통섭적인 독서이다. 덧붙인다면 양(糧)이 질(質)을 능가하는 것이 인문학의 사망선고이다. 인문학의 부활을 꿈꾼다면, 융합·통섭적인 질을 찾아 나서야겠다. 사람을 떠난 인문학을 찾으려면, 사람이 모여야 한다. 그러나 사람이 많이 모이면, 말도 많고 탈도 많다. 말도 많고 탈도 많은 것이 융합·통섭이 아닌, 학문의 가지를 치게 했다. 가지를 치는 사이에 사람은 없어지고 학문만 덩그렇게 벌판에 서게 했다. 그러니 사람이 도망간 빈자리에 학문이 있은들 무슨 소용인가. 대학 입시에서 이과(理科)와 문과(文科)가 갈라진 나라는 전 세계적으로 한국, 일본, 대만뿐이다. 이과와 문과로 갈라진 곳에 사람이 없다. 이 나라 가운데서 공부를 가장 많이 하는 나라는 우리뿐이다. 여기에서 많다는 것은 대학 입시를 위한 것뿐이다. 현재 수능이 끝나자 고교 교실은 단축 수업에만 열중한다. 고교 교실에서부터 인문학의 사망선고를 받은 셈이다. 이들이 자기가 원하는 대학에 입학을 해도, 사람의 인문학은 어디로 가고 없을 게다. 문사철(文史哲)이 전통적으로 인문학이다. 그러니 인문학의 부활을 꿈꾼다면, 문사철을 우선 읽어야겠다. 읽되, 사람을 사유(思惟)해야 한다. 사람 중심이다. 이웃 배려이다. 사랑이다. 나눔이다. 섬김이다. 이 같은 것이 없다면 경제논리와 경쟁논리가 판칠 뿐이다. 경제논리와 경쟁논리가 판치는 세상은 도대체 사람이 사는 동네가 아니다. 서로 잡아먹는 야수(野獸)의 세상이다. 그 누구도 야수의 세상을 바라지 않을 것이다. 그렇다면 문사철로써 사람이 부활을 해야 한다. 야수의 벌판에서 사람을 찾기 위해 인문학의 부활을 꿈꾸고, 사람이 사는 동네 만들기에 너도나도 앞장서자. 房玘泰 편집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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