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최우선주의(MAGA)로 무장된 도널드 트럼프 2기 행정부 출범 이후 국제 관계가 격변하는 가운데 산업과 외교, 경제와 안보의 경계는 점점 흐려지고 있다. 미국은 기술 패권을 유지하기 위한 공급망 재편, 기술동맹 강화, 그리고 중국 견제에 총력을 기울이고 있으며, 이 과정에서 동맹국들과의 협력은 단순한 경제협력을 넘어 안보 전략의 핵심 요소로 부상하고 있다.
이번에 한국과 미국의 관세 협상 과정에서도 이런 국제 질서의 변화가 작동하고 있음이 확인되었다. 정부는 미국과 상호 관세율을 15%로 합의했으며, 이에 더해 한국이 총 3,500억 달러 규모의 대미 투자를 약속했다고 발표하였다.
여기서 가장 주목되는 게 바로 조선업에 대한 1,500억 달러 투자이다. 이는 전체 투자 규모의 43%에 달하는 것으로서, 이번 협상에서 ‘조선업 협력 프로젝트(MASGA)’가 중요한 카드로 작용했음을 보여주고 있다. 이 1,500억 달러는 앞으로 조선업 생태계 전반에 걸쳐 투입될 예정이며, 이는 선박 건조, 유지·보수·정비(MRO), 조선 기자재 분야까지 포괄하는 대규모 협력이다.
한국의 조선 산업은 더 이상 단순한 제조업이 아니다. 이른바 K-조선은 LNG 운반선, 자율운항, 친환경 선박 등 고부가가치 선박 분야에서 세계 최고 수준의 경쟁력을 갖추고 있다. 그런 점에서 에너지, 안보, 기후 기술이 융합된 경제 안보 자산이자, 미국이 가장 필요로 하는 전략 분야의 하나다.
미국이 에너지 수출 확대, 탄소중립 전환, 해양 안보 강화를 동시에 추진하는 가운데, K-조선은 이 세 가지 목표를 실현할 수 있는 핵심 파트너다. 미국 내 상업용 친환경 선박 생산 능력은 여전히 미비하며, 조선 인프라 재건이 시급한 상황이다. 특히 인도-태평양 전략에서 중국 패권을 견제할 수 있는 해군력 증강에서 필수적이다.
정부는 이번 관세 협상의 결과를 국익 중심의 실용 외교가 빛을 발한 것이라 하지만 우려스러움은 여전하다. 사실 실용 외교는 미·중 전략 경쟁 구도 속에서 미국의 신뢰를 흔들 수 있는 위험성이 있다. 미국은 자유민주주의, 기술 보호, 공급망 안정이라는 가치를 공유하는 ‘확실한 동맹’을 원한다. 한국이 그 기준에서 벗어나 모호한 입장을 견지한다면, 조선업을 비롯한 핵심 산업의 전략적 협력 역시 약화할 수밖에 없다.
우리는 이번 미국과 관세 협상 타결과 3,500억 달러 투자라는 기회를 발판 삼아, K-조선을 단순한 수출 품목이 아닌 경제 안보 동맹의 대표 자산으로 자리매김해야 한다. “K-조선은 미국의 에너지 안보와 기술 경쟁력 유지에 필수적인 동맹 자산”이라는 메시지를 분명히 전달하고, 신뢰 기반의 기술동맹 구축에 적극 나서야 한다. 단순한 산업 협력에서 벗어나, 기술 보호, 산업 보안, 디지털 안전망 등 한국이 강점을 지닌 분야를 미국과 공유하는 것이 중요하다.
일본은 이미 반도체 소재·장비를 전략 자산화하여 미국과의 기술동맹을 강화했고, 유럽은 기후 기술과 안보 공조를 통해 보조금 정책에서 일부 예외를 확보했다. 이들 국가처럼 한국도 통상 이슈를 기술 및 안보 협력과 연계하는 복합 전략이 필요하다.
K-조선은 단지 배를 만드는 산업이 아니다. 기술, 신뢰, 가치 외교가 집약된 경제 안보의 플랫폼이다. 조선업에 대한 1,500억 달러 투자는 미국의 신뢰를 바탕으로 한 기술동맹 강화의 상징이며, 향후 반도체, 원전, 이차전지, 바이오 등 전략 산업 전반으로 협력이 확산할 수 있는 중요한 전환점이 될 것이다.
이제 한국은 지나치게 실용을 앞세워 전략적 모호성을 유지하기보다 미국과 자유민주주의라는 가치를 공유하는 신뢰 기반 외교를 강화해야 한다. 그래야만 조선업을 비롯한 전략 산업들이 글로벌 공급망에서 흔들림 없이 중심축 역할을 할 수 있으며, 한국도 진정한 경제 안보 파트너로 자리매김할 수 있다. 기술동맹과 경제 안보, 가치 외교가 삼위일체로 뒷받침될 때, K-조선은 미래 세대에게도 지속 가능한 전략 자산이 될 것이다. 이 기회를 놓치지 않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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