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해 대한민국 의료계는 “의료농단”과 “의료대란”이라는 극단적인 단어로 요약되는 역사적 혼란을 겪었다. 국민은 연이은 파업과 진료 차질, 협상 결렬을 지켜보며 깊은 피로감과 분노를 쌓았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도 근본적 해법은 보이지 않는다. 의료 현장은 여전히 불신과 갈등의 늪에 빠져 있고, 정부·국회·의료계·법조계 모두가 “대화”를 말하면서도 정작 타협은 철저히 외면한다. 도대체 왜 아무도 양보하지 못하는가?첫째, 정치와 여론의 프레임이 문제의 본질을 흐리고 있다. 정부는 의대 정원 확대와 공공의료 강화를 “국민 모두를 위한 개혁”이라 강조하며 정치적 명분을 쌓았다. 그러나 의료계는 이를 “졸속 추진”과 “생존권 위협”으로 받아들였다. 언론과 SNS는 “의사 기득권 수호” 혹은 “정부의 폭주”라는 단순한 대립 구도로 갈등을 소비했다. 결국 어느 쪽도 먼저 한 발 물러서는 순간 “패배자”로 낙인찍힐 수 있다는 두려움이 커졌다. 그 두려움이 대화의 문턱을 극도로 높였다.둘째, 의료계 내부의 분열과 경쟁 심리가 해법을 더 어렵게 만든다. 의료계는 한 목소리로 보이지만, 실상은 이해관계가 매우 다르다. 대형병원 교수진, 개원의, 전공의, 공공의료 종사자들은 모두 처지가 다르고, 정부와 협상에 임하는 단체와 강경 투쟁을 고수하는 단체 간의 갈등도 깊다. 내부에서조차 “누가 대표성을 갖는가”를 두고 다투는 사이, 정부는 “협상 파트너 부재”를 명분으로 내세운다. 여러 목소리가 뒤섞인 상황에서 지속 가능한 합의를 이끌어내기란 결코 쉽지 않다.셋째, 국회와 법조계의 정치적 계산이 해결을 가로막는다. 국회는 표심을 의식해 어느 편도 선뜻 들지 못한다. 선거를 앞두면 “누가 더 책임을 질 것이냐”는 정치적 부담부터 계산한다. 법조계는 이미 수많은 의료분쟁 소송과 행정 처분에 매달려 있다. 언제든 협상이 형사·민사 공방으로 비화할 수 있다는 점에서, 작은 유화 제스처조차 리스크로 인식된다. 결국 서로가 서로를 경계하며 한 발짝도 움직이지 못하는 구조가 고착됐다.그러나 무엇보다 큰 문제는 신뢰의 완전한 붕괴다. 정부는 “국민의 건강권을 위해 의대 증원이 불가피하다”고 말하고, 의료계는 “정부가 의사를 죄인 취급하며 일방적으로 몰아붙였다”고 맞선다. 국민은 누구의 말이 진실인지조차 가늠하기 어려운 피로감을 호소한다. 이처럼 신뢰가 무너진 상황에서는 어떤 타협도 불가능하다. 서로의 진정성을 믿을 수 없기 때문이다.이제 출구는 서로의 책임을 인정하는 데서 시작해야 한다. 정부는 정책 추진 과정의 미비와 오만을 인정해야 한다. 의료계는 국민의 생명을 볼모로 한 집단 행동이 결코 정당화될 수 없음을 고백해야 한다. 국회는 표심 계산을 내려놓고, 지속 가능한 의료 제도의 청사진을 논의해야 한다. 법조계는 끝없는 분쟁 반복이 아니라 제도적 조정과 중재에 더 적극적으로 나서야 한다. 그러나 현실은 누구도 먼저 책임을 인정하려 하지 않는다. 모두가 “상대가 먼저 사과하라”고 외친다. 그동안 쌓인 불신의 벽은 더 높아졌다.갈등이 깊어질수록 국민은 의료를 더 불신하게 된다. 응급실 문 앞에서 고통을 호소하는 환자, 진료가 수개월씩 미뤄진 만성질환자, 희귀병 아동의 부모들은 누구의 편도 들지 못한 채 방치된다. 의료인은 “이제 더 이상은 못하겠다”고 절규하고, 정부 관료들은 “더 강경하게 밀어붙이자”는 유혹을 느낀다. 이 악순환은 결국 더 큰 파국을 부를 것이다. 그 파국의 무게는 오롯이 국민의 삶 위에 쌓인다.우리가 반드시 기억해야 할 점이 있다. 의료는 단순한 서비스가 아니라 국민의 생명을 지키는 마지막 보루라는 사실이다. 아무리 이해관계가 다르고 불신이 깊어도, 생명을 위한 최소한의 합의와 협력은 결코 포기할 수 없다. 타협은 패배가 아니라 책임 있는 성숙이다. 이념과 계산을 넘어, 미래 세대가 다시 의료를 신뢰할 수 있도록 하는 용기 있는 선택이어야 한다.이제 누군가는 먼저 손을 내밀어야 한다. 타협은 더 이상 미룰 수 없는 절박한 과제다. 국민은 더 이상 기다릴 수 없다. 이 위기가 단순한 소동이 아니라, 수년간 누적된 모순이 폭발한 결과임을 직시해야 한다.타협은 누군가의 완전한 승리를 뜻하지 않는다. 누군가는 손해를 보고, 누군가는 자존심을 내려놓아야 한다. 그러나 지금의 대한민국 의료 현실은 그 어떤 완강함보다 타협이 더 시급하게 필요한 국면이다. 정부도, 의료계도, 정치권도, 법조계도 국민 앞에 솔직해져야 한다. 이제는 서로를 비난하는 긴 밤을 끝내고, 함께 책임지는 아침을 준비할 시간이다.그리고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시민의 냉철한 감시와 참여다. 의료가 정쟁의 도구로 전락할 때, 결국 피해자는 국민임을 더 이상 잊어서는 안 된다. 생명을 둘러싼 갈등에 무관심으로 일관한다면, 다음 위기는 더 잔혹하고 더 돌이킬 수 없는 결과를 남길 것이다.타협이야말로 생명을 지키는 마지막 도리이며, 앞으로 우리 사회가 다시 신뢰를 회복할 수 있는 유일한 출발점이다. 그것이야말로 국민이 바라는 진짜 ‘의료 정상화’의 길이다. 이제 정부도 의료계도 스스로에게 물어야 한다. “무엇을 위해 이 자리에 있는가?”라는 질문을. 그 질문에 답하려는 용기 없는 정치는, 국민의 생명을 담보로 한 무책임일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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