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월은 "호국보훈의 달"이며 6월 25일(수)은 북괴의 남침으로 일어난 6.25전쟁 75주년이 되는 날이다. 이날이 가까이 오면 어머니께서 내가 어릴 때 늘 들려주시던 북괴의 침략과 함께 피란시절 때 우리 가족이 북괴군을 만나 생사의 갈림길의 긴박했던 상황에서 5살이던 어린 내가 우리 가족을 살렸다며 말씀하시던 생각이 어머니의 그리움과 함께 되살아난다.그리고 나는 이 회상의 글을 매년 6월이 되면 이곳저곳에 올려보기도 하고, 현직에 있을 때는 6.25가 가까워오면 이따금 학생들에게 안보 차원의 특강도 하며 북한의 남침을 상기시켰다. 그리고 매번 이곳저곳에 글로 남기는 이유는 지금도 6.25 전쟁을 직접 겪어보지 못한 일부 종북좌파들과 함께 왜곡된 시각의 젊은이들은 “북한이 남침한 것이 아니고 미군과 함께 대한민국의 북침이다”라고 생각하고 있기 때문이다. 어쩌면 이들은 그 당시가 미군이 아니었다면 남북통일의 절호의 기회였다고 왜곡된 생각을 하고 있기 때문이며 일부 극좌파 단체들은 미국대사관 앞 등에서 "미군 고 홈"을 외치며 미군철수와 함께 국가보안법 폐지 등을 늘 주장하고 있기 때문이다.이들의 생각은 북한의 핵무기도 우리가 통일되면 핵보유국으로 위력을 발휘할 수 있다는 생각하고 있고, 미군 때문에 통일을 이루지 못했다는 정말 어처구니없는 생각을 하기 때문이다.지난 문재인 정권 또한 종전선언을 주구장창 주장하고 다니며 북한의 제재를 풀어달라고 요구하며 문재인 자신도 마크롱 대통령에게 직접 UN 안보리에서 요구해달라 했다가 북한이 구체적 비핵화 의지를 보여주기전까는 UN 제재를 풀어줄 수 없다고 공동기자회견에서 밝히자 머쓱해지기도 했다.이러하듯 종북좌파들의 종전선언을 갈구하는 이유는 주한미군 철수에 그 주안점이 있고 이후 연방제 통일을 이룩하려는 게 그들의 속셈이다.6. 25사변~6. 25동란~우리가 어릴 때는 흔히 늘 이렇게 불렀다.생각만해도 전쟁의 참화 속에 얼마나 많은 우리 민족들이 희생되었으며, 3만 5천명의 미군과 유엔군들을 비롯한 그 희생과 상처 또한 지금까지 아물지 않고 있으며, 나 역시 전쟁의 흔적을 이 몸에 지니고 있다.나는 서울에서 태어나 6.25 당시 우리 가족은 서울에서 살았으며 아버지는 일제시대 일본 메이지대학(明治大學)을 졸업 후 경성일보(서울신문전신) 정치경제부 기자로 계셨고, 어머니는 남대문 부근(서소문동 7번지)에서 작은 서점을 경영하고 계셨으며 나는 그 당시 5살로 단란한 가정이었다.1950년 6월 25일 새벽 4시 갑자기 밀어닥친 북괴의 남침으로 사흘만인 6월 28일 서울이 함락되고 그날 새벽 2시경 한강 인도교가 폭파되어 우리 가족은 피할 겨를도 없었으며, 젊은 지식인들을 납북시키거나, 사상 교육시킨다는 명목으로 마구 잡아들이던 시점이라 아버지는 황급히 남은 가족인 우리를 두고 그 당시 외가인 경북 문경군 동로면 적성리(벌재)로 피신하였다.갑자기 인민군 치하에 들어간 서울은 완장을 찬 남로당 좌파들과 합세한 북한의 선전 요원의 선전에 동원되어 우리들은 밤낮없이 학교 강당 등 주변 공공건물에 모여 북한 체제의 선전과 인민재판에 동원되어 밤마다 시달리는 시민들과 함께 공산 치하에서 남아있는 우리 가족 3명(어머니, 나, 동생)은 혹시 불이익이 돌아오지 않을까 걱정하는 어머니와 늘 교육 현장에 열심히 참여하며 따라다녔다.북한 요원들은 주로 그 당시 김일성 장군 노래를 집중적으로 가르치며 사상교육과 함께 어떨 땐 인민재판 과정에서 그들이 보는 불순세력(?)을 처형하였으며, 공포심을 조성하며 남침할 당시 인민군 행군용으로도 그 노래를 많이 부르며 내려왔다고 한다.노래의 가사는"장백산 줄기줄기 피어린 자욱압록강 굽이굽이 피어린 자욱오늘도 자유조선 꽃피는 우에력력히 비쳐주는 거룩한 자욱아~ 그 이름도 그리운 우리의 장군아~ 그 이름도 빛나는 김일성 장군." 이란 노래였다.이따금 홍보요원이 어느 한 사람을 지적해서 김일성 장군의 노래를 한번 불러보라고 확인도 했기에 나누어준 쪽지를 보고 어머니도 열심히 익히고 따라 불렀다고 한다.그러던 어느 날 우리 가족은 한강철교가 끊어진 상태에서 나룻배를 타고 아버지와 합류하기 위해 남으로 피란길에 접어든다.김환기 작품의 "피란 열차"에서 보는 것처럼 열차 지붕 위까지 꽉찬 열차는 탈 엄두도 못내고 한강나루에서 콩나물 시루같이 빽빽히 실은 배로 아슬아슬하게 한강을 넘어 걸어서 남으로 남으로 내려와 아버지와 극적인 상봉을 했다.한동안 처가에서 생활하신 아버지는 인민군들의 활동이 잦은 경북 문경 동로보다는 고향인 경북 예천군 호명면으로 옮기려고 이동 중이었다.이때는 더글러스 맥아더 장군의 9월 15일 인천상륙작전으로 허리가 잘린 인민군들은 뿔뿔이 흩어져 주로 동부 백두대간의 산악지대를 통하여 북으로 향하거나 올라가지 못한 인민군들은 지리산 등에 파르티잔(빨찌산)으로 남아 활동하고 있었다.남침했을 때와는 달리 북으로 올라가던 인민군들은 그 당시 악랄했으며, 어쩌다 산길에서 만나도 북쪽을 향해 걸어가야지… 남쪽을 향해 가게 되면 따발총을 지닌 상태라 사람에 따라 뒷사태가 알 수 없는 상황일 수 있었기에 매우 위험하며 불안했었다.그런 상태에서 우리 가족은 고향 예천을 향해 남으로 숨어서 내려가고 있었다.그러던 어느 날 충북 단양의 산모퉁이를 돌 무렵 북으로 향하던 인민군 1명이 갑자기 나타나 우리 가족과 마주치고 말았다.생사를 가름하는 긴박한 상황…인민군이 따발총을 겨누며…*인민군: 동무들 왜 남으로 가시오? 우리가족… 덜덜덜 떨며 아무 말도 못했다.*아버지: (약간의 침묵이 흐른 후)등 넘어 고향에 노모가 계셔 잠깐 뵙고 떠날려고…(옆에 어머니도 덜덜덜… 한동안 침묵이 흐르고… 인민군이 우리 가족을 이리저리 훑어보고 있는 긴박한 순간~)이게 웬일일까! 누가 시킨 것도 아닌데…갑자기 김일성 장군의 노래를 목놓아 부르는 어린 5살 꼬마 노영현~!*꼬마 영현: "장백산 줄기줄기 피어린 자욱 ???? ???? ~~"(노래는 계속 이어지고…!)*인민군: (잠시 내 노래를 듣던 인민군…긴장이 풀린 상태에서 내 머리를 쓰다듬으며…)너 노래 잘 부른다 야…! (그 당시 내 윗 호주머니에 삐죽이 나온 쪽지 하나… 그것은 김일성 장군의 노래를 프린트한 가사였으니…!)*인민군: (우리 가족의 성분을 인정한 듯~ 그는 그 쪽지를 찢으며 하는 말~)"지금 미제(美帝)가 침입했으니 이런 쪽지는 없애고 고향에 빨리 다녀 오시라우요"*우리 가족:(그제서야 안도의 한숨…) 걸음아 날 살려라~하고 길을 재촉했다.지금도 유월이 되면 돌아가신 어머니께서 들려주시던 그 옛날의 긴박했던 상황이 생각난다.이러하듯 전쟁을 5~8살까지 직접 겪은 나는 어릴 때 전쟁의 참화 속에서 너나없이 궁핍하게 생활하며 교실도 불타고 없는 초등학교 시절이 지금도 생각난다. 내가 입학한 추풍령초등학교는 폭격으로 교사가 전부 소실되어 시장터 창고와 여름에는 학교주변 느티나무 밑에서 공부하기도 했다.추풍령은 지리적으로 국도- 고속도로-철도가 서로 이웃하며 넘어가는 교통의 요지인 고갯길이다. 특히 학교가 폭격당한 이유는 그 당시 인민군들의 야전기지와 야전병원으로 쓰였기에 미군에 의해 폭격당했다고 한다.초등학교 시절 당시 미국과 함께 유엔으로부터 원조를 받은 물품에는 악수를 한 이미지의 성조기가 있었으며, 나누어준 분유를 쪄서 먹으며, 질이 낮은 선화지 같은 종이로 만든 교과서 뒷표지에는 "이 책은 UNKRA(유엔한국재건단)의 지원을 통해 제작되었다"라고 인쇄되어 있었다.특히 초등학교 시절 6.25가 가까이 오면 학교마다 6.25 전쟁을 상기하는 기념식은 물론 표어 짓기, 포스터 그리기 대회들과 함께 연극 등 각종 행사를 가졌던 옛 추억과 함께 이날을 상기하게 된다.6.25 참전 16개국은 미국, 영국, 프랑스 등 선진국들도 있었지만 2차대전 후 폐허 속에 어려웠던 필리핀도 7000명이나 파견했으며, 멀리 아프리카의 남아공과 에티오피아 그리고 남미의 콜롬비아도 참전했다.그리고 전쟁 후 지금 내전과 함께 IS의 본거지로 지난해 지진과 함께 혼란 속에 어려운 생활을 하는 중동의 시리아도 그 당시 3650달러를 UNKRA를 통해 우리나라를 지원했다. 요사이 세계는 중동의 하마스와 이스라엘 전쟁 그리고 우크라이나와 러시아 전쟁과 함께 러시아는 끊임없는 소련시대의 위성국들을 되찾기 위해 명분 없는 영토전쟁을 일으키고 있고, 중국의 시진핑은 영구집권 속에 일대일로와 함께 중국몽을 실현하기 위해 미국과 맞서 침략야욕을 부리는 신 냉전구도가 형성되고 있다.미국 US뉴스앤월드리포트(USNWR)가 지난해 발표한 ‘세계에서 가장 강력한 국가 2022년(the planet’s most powerful countries)`에서 한국과 일본은 각각 6위와 8위에 올랐다. 그 전 조사에서는 일본이 6위, 프랑스가 7위 한국이 8위였는데 지난해 순위가 뒤바뀌었다.그만큼 지금 우리나라는 지난 누리호 발사 성공과 과학 및 방위산업의 발전 등 세계속에 경제대국과 함께 선진국을 이룩하여 어려움 없이 잘살고 있는 것 또한 6.25전쟁 때 도와준 미국을 비롯한 UN의 16개국과 장진호 전투를 비롯한 각 곳의 전투에서 이분들의 그 값진 희생들이 바탕이 되었기 때문이다.더욱더 명심해야 할 것은 전쟁의 막바지에서 중공군 7사단(12만명)의 인해전술에 포위된 흥남으로 철수하는 과정의 "장진호 전투"에서 혹한(酷寒) 속 동상(冬傷)에 걸리며 희생된 미군들의 고귀한 희생을 결코 우리는 잊지 말아야 한다. 겨울이 일찍 오는 해발 2000m가 가까운 개마고원의 장진호 일대의 기온은 영하 30도의 혹한 속에 전투가 막바지로 치닫던 11월 24일은 영하 37.5도에서 방한복 준비가 거의 없었던 미군은 추위와 함께 동상에 걸렸으며 무릎까지 올라오는 고무로 된 방한화는 내부의 땀을 배출하지 못해 방한화와 함께 발이 통째로 얼게 되어 벗겨지지 않아 방한화와 함께 수술로 발을 잘라낸 병사도 있었다.그 당시 6532명의 미군들이 죽어갔으며 살아있어도 동상으로 인한 수족의 절단으로 수많은 병사들이 고통받고 있었다."장진호 전투"는 2차대전 이후 "모스크바 전투", "스탈린그라드 전투"와 함께 세계 3대 동계 전투로 알려져 있지만 장진호 전투가 가장 최악의 전투로 1950년도 사건 당시, 미국의 뉴스위크지는 "진주만 피습 이후 미군 역사상 최악의 패전"이라고 혹평하였다. 세계 2차대전 이후 1945년 10월 24일 국제연합(UN)이 창설되고 2차대전 이후 양분된 이데올로기가 처음 맞은 6.25 전쟁은 우리나라를 처음 도와주는 계기가 되었으며 이후 세계질서는 미국을 중심으로 자유진영과 구소련을 중심으로 공산주의로 더욱 구체화되며 냉전 속에서 자유진영은 더욱 발전하는 모습으로 나타났다. 우리들 학창시절과 졸업 후에도 10월 24일은 한때 "유엔의 날(UN Day)"이라 하여 그날을 기다리며 노는 날이었다.  즉 국제연합창설일(10월24일)은 초대 이승만 대통령 당시인 1950년 9월16일부터 법정공휴일로 지정하였다. 6,25 참전국에 대한 감사와 관심도 표명의 의미로 각 학교나 직장에서는 성대한 기념식을 가지기도 했다. 그러나 1976년 9월 3일, "각종기념일 등에 관한 규정"에 의해 법정공휴일에서 제외가 되었고 지금은 세월의 흐름 속에서 특히 젊은이들 사이에는 잊혀져 가고 있다. 우리가 지금 IT 및 최첨단 산업발전과 지난번 순수한 우리기술로 제3차 누리호 발사 성공과 과학 및 방위산업의 발전 등 세계 속에 경제 대국과 함께 어려움 없이 잘살고 있는 것 또한 장진호 전투를 비롯한 각 곳의 전투에서 이분들의 그 값진 희생들이 바탕이 되었기 때문이며 이를 결코 잊어서는 안 된다.이분들은 이제 거의 고인이 되셨거나 살아있어도 90대 중반을 훌쩍 넘었으리라 생각된다.미국 워싱턴DC에 있는 "한국전 참전 기념공원" 에는 "Freedom is not free" (자유는 그냥 얻어지는 것이 아니다) 라고 새겨져 있다.6.25 노래의 첫 귀절이 생각난다."아~ 아~ 잊으랴 어찌 우리 이날을~"-靑松愚民 松軒-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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