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 말 조선 초, 격동의 시대를 지나며 의연히 한 자리를 지킨 인물이 있다. 바로 달성서씨의 중시조, 서침(徐沈) 선생이다. 그는 고려에서 벼슬하던 문신이었으나, 조선이 건국되자 벼슬을 버리고 낙향하여 한 평생 유유자적하며 자손 교육에 힘쓴 인물이다.서침은 단지 관직을 떠난 은거자가 아니었다. 그는 "때를 아는 것이 군자의 도리요, 절조를 지키는 것이 학자의 길"이라 말하며, 후손들에게 순응보다 중심을 지키는 삶을 강조했다. 그의 삶은 유학의 실천이었다.대구 달성 지역, 특히 지금의 서씨마을(산격동) 일대는 바로 서침의 후손들이 정착한 뿌리이다. 그곳에서 이어진 수백 년의 세거는, 단순한 혈연 집단이 아닌 ‘가르침이 있는 혈통’으로 존재해왔다.서침의 가르침은 간단했다. 첫째, 정직할 것. 둘째, 남에게 부끄럽지 않게 살 것. 셋째, 배운 바를 몸으로 실천할 것. 이 세 가지는 오늘날에도 통하는 교육의 핵심이며, 성실과 청렴의 본보기로 후대에 전해진다.그는 ‘벼슬이 크다 하여 위인이 되지 않고, 이름이 높다 하여 진실한 것은 아니다’라고 했고, 실제로 자신은 조용히 퇴관하면서도 자손에게 독서와 농사, 충효를 권했다.그의 후손 중에는 서명선, 서사원 등 조선 유학계와 관료사에 이름을 남긴 이들이 많다. 이는 단순한 우연이 아니다. 서침의 뿌리 깊은 교훈이 오랜 시간 지역과 문중의 정신이 되어 작용한 결과이다.그가 강조한 또 하나의 덕목은 ‘자중자애’였다. 즉, 자신을 낮추고 남을 너그럽게 품으라는 뜻이다. 이는 단순한 도덕적 이상이 아니라, 혼란의 시대를 사는 백성들에게 삶의 실천적 지침이 되었다. 이런 태도는 후대 후손들에게 겸손과 화합의 미덕으로 이어졌고, 문중 내 갈등을 줄이고 공동체를 유지하는 힘이 되었다.서침의 삶은 대단히 조용했으나, 그 영향력은 결코 작지 않았다. 고려가 무너지고 조선이 세워지는 전환기 속에서, 그는 비판도 충성도 아닌 ‘절제된 침묵’을 선택했다. 이는 체제 순응이 아니라, 신념을 지키는 가장 고요한 저항이기도 했다.오늘날 대한민국 사회는 다시 격변의 시기를 지나고 있다. 급변하는 가치, 무너지는 신뢰, 정치적 혼란 속에서 우리는 ‘무엇이 중심인가’라는 물음을 던져야 한다. 바로 그 지점에서 서침의 가르침은 유효하다.그의 말처럼, 정직하고 부끄럽지 않게 살며, 배운 것을 실천하는 삶은 시대를 초월하는 가르침이다. 그리고 그런 사람이 많아질수록, 사회는 더 단단해질 것이다.서침의 무덤은 대구 땅에 있으나, 그의 정신은 산격동 서씨마을을 넘어 전국의 후손들, 나아가 대한민국의 정신문화를 이루는 밑거름이 되고 있다. 단단한 뿌리가 깊은 나무를 키우듯, 그가 남긴 뿌리는 지금도 조용히, 그러나 강하게 우리를 지탱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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