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나라에는 사계절이 있어서 참 살기 좋은 나라다. 봄에는 연초록의 새싹이 마음을 설레게 하고, 여름에는 생명력이 넘치는 초록의 물결이 들판을 가득 메운다. 가을이 오면 황금빛 논과 들이 익어가고, 겨울이면 고요한 흰 눈이 대지를 감싸며 사색에 잠기게 한다. 이렇듯 계절의 변화는 단지 기온의 차이만이 아니라, 풍경과 색채, 냄새와 소리, 감정의 결까지 바꾸어 놓는다. 도시보다는 농촌에서 이 변화를 더 가까이, 더 진하게 느낄 수 있다. 들판 한 귀퉁이의 풀꽃 하나도 계절의 흐름에 따라 자리를 바꾸고, 그에 따라 농부의 하루 또한 달라지기 때문이다. 그래서인지 농촌의 사계절은 눈으로 보는 것이 아니라 몸으로 살아내는 것이다.
계절이 바뀔 때마다 사람들은 옷을 갈아입듯 일상의 리듬을 조금씩 바꾼다.요즘 오가향은 금계국의 노란 물결로 물들고 있다. 집 앞마당을 비롯해 밭둑과 마을 어귀, 심지어는 장독대 옆까지, 금계국은 그 어디에서든 제 존재를 뽐낸다. 초여름이 시작될 무렵, 짙어진 초록의 배경 위에 금계국은 환하게 웃으며 피어난다. 눈부신 햇살 아래 하늘거리는 그 모습은 마치 여름의 여왕처럼 당당하고 우아하다. 오가향을 찾는 이들은 처음엔 그 노란 풍경에 놀라고, 곧이어 그 생기와 기운에 빠져든다. 피곤에 젖은 장아지매의 눈도 어느새 맑아지고, 무거운 마음도 가볍게 풀린다.
금계국은 얼핏 보면 코스모스를 닮았다. 그래서 여름에도 코스모스가 피는가 착각하기도 한다. 그러나 금계국은 코스모스보다 꽃잎이 더 단단하고, 색감은 더 선명하다. 특히 햇살을 받을 때는 그 빛이 더 짙어져, 마치 태양을 닮은 듯하다. 바람에 흔들릴 때면 마치 황금 물결이 흐르듯 출렁이는데, 그 장면을 보고 있노라면 잠시 모든 근심이 사라지는 듯하다. 그 노란 꽃잎은 닭벼슬을 닮았다 하여 ‘황금닭 국화’라는 별명도 있다. 이름부터 풍요롭고 정겹다.
무엇보다 마음을 끄는 것은 그 꽃이 주는 감정이다. 금계국의 꽃말은 ‘상쾌한 기분’. 그 말처럼 보는 이의 기분을 환하게 만든다. 꽃 한 송이가 사람의 기분을 바꿀 수 있다는 사실을 금계국을 통해 다시 실감하게 된다. 특히 바람이라도 불어오는 날이면, 금계국 무리는 마치 누군가의 손짓처럼 물결을 이루며 흔들린다. 그 풍경은 그림 같고, 그 안에 서 있는 나 역시 그 한 장면의 일부가 된 듯한 착각에 빠진다.
산딸기 수확철인 요즘, 하루하루가 고단하다. 아침부터 밭에 나가 따가운 햇살과 싸우며 손끝으로 열매를 따는 일은 그리 간단치 않다. 가시덤불 사이에서 조심스럽게 손을 움직이고, 낮게 허리를 굽힌 채 긴 시간을 보내다 보면 몸은 물론 마음까지 지칠 때가 많다. 수확의 기쁨은 잠시, 연이은 작업과 더위에 지쳐가는 농부의 일상. 그런 어느 날, 일하던 손을 멈추고 고개를 들어 바라본 금계국 무리는 말없이 내게 말을 건다. “괜찮아, 잘하고 있어.” 바람을 타고 노란 꽃잎이 흔들릴 때마다 그런 응원이 들려오는 듯하다.
‘흔들리지 않고 피는 꽃이 어디 있으랴.’ 시인 도종환의 말이 문득 떠오른다. 바람에 흔들리는 금계국은 오히려 더 아름답다. 그 모습은 우리 삶과 닮아 있다. 누구도 흔들리지 않고 살아갈 수는 없고, 오히려 흔들리는 시간을 지나야만 꽃을 피울 수 있다. 자연은 그렇게 말없이 많은 것을 가르쳐준다. 금계국을 바라보며 그런 생각을 한다. 나도 언젠가 이렇게 환하게 피어나기를, 누군가에게 상쾌한 기분을 줄 수 있는 사람이 되기를.
짧은 시간, 노란 금계국의 매력에 빠져든다. 화려하면서도 소박하고, 찬란하면서도 다정한 이 꽃은 마치 자연이 건네는 위로 같다. 그 곁에 서 있는 것만으로도 마음이 환해진다. 계절의 한복판에서, 자연의 품 안에서, 나는 오늘도 다시 살아갈 용기를 얻는다.노란 금계국 세상, 그 속에서 나는 지금 이 계절의 축복을 온몸으로 누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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