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상매일신문=김경철기자]신라 제31대 신문왕이 선왕인 문무왕의 운구 행렬에 몸소 참여해 경주시 문무대왕면 봉길리 앞바다에 수장키 위해 직접 행차한 길로 널리 알려진 ‘왕의길(추령재~기림사)’이 트레킹코스로 각광을 받고 있는 가운데 경주시 보문동 남촌마을 주민들이 궁궐인 월성에서 멀지않은 보문마을길(도로명주소) 변에 위치한 설총묘에서 명활산과 추령재로 이어진 오래된 길이 왕의길 입구라고 주장해 고고학 등 관련학계로부터 비상한 관심을 받고 있다.
지역의 향토사학자와 고고학 관계자들은 7일 보문마을길이 왕의길 입구라고 주장하는 남촌마을 주민들의 제보에 따라 설총묘와 서당못을 지나 청고개, 흰등산, 명활산, 추령재 등 약 5㎞ 구간을 답사한 결과 용기류와 마구류 등 유물을 다수 수습했고, 오래된 성황당 돌무더기를 확인했고, 1400~1500년 전에 조성됐으리라 추정되는 도로 유구도 다수 발견했다.
당시에는 말과 마차, 신라인이 다녔겠지만 수많은 세월동안 도로에 수목이 자라거나 산사태 등으로 도로가 끊긴 흔적도 확인했다.
고고학 관계자인 A씨는 “현재까지 보존되고 있는 오래된 이 길은 월성, 동궁과월지, 황용사지, 설총묘 등지에서 명활산, 추령재 등지로 이어져 있으며 보문마을길은 월성과 추령재 한가운데 위치해 있다”며 “이 길이 신라시대 때 월성에서 동해안으로 연결되는 유일한 도로였을 개연성은 충분하지만 지표조사와 시굴조사를 통해 확인하고 발굴조사로 이어져야 한다”고 말했다.
남촌마을 주민 B(80대)씨는 “50~60년 전 보문관광단지가 조성되기 전까지만 해도 남촌마을 주민들이 문무대왕면과 감포읍으로 갈 때 이 길이 유일했으며 지나갈 때 소원을 빌며 성황당 돌무더기에 돌을 얹은 기억이 새삼스럽게 떠오른다”고 회상했다.
남촌마을은 경주시내에서 구황네거리를 지나 보문관광단지로 통하는 대로변 남쪽에 위치한 넓은 뜰을 지닌 아늑한 마을로 약 300년 전 성균관 진사 남용만이 이 마을에 정착해 대대로 살면서 남씨마을 또는 남촌이라 불렸던 곳이며 진평왕릉(사적 제180호)과 설총묘(경북도기념물 제130호)가 자리 잡고 있다.
남촌마을 인근에는 신라의 왕실 및 불교 유적들이 산재해 있는 낭산이 있다. 경주낭산일원은 사적 제163호로 지정돼 있다.
낭산에 분포한 대표적인 유적은 산의 남쪽 끝에 있는 사천왕사지와 망덕사지를 비롯해 동북쪽에 자리 잡은 황복사지, 서쪽 가운데에 위치한 문무왕의 화장터로 추정되는 능지탑, 남쪽 봉우리 아래 선덕여왕릉 등이다.
근대 때 옛날의 좁은 길에 자동차가 다닐 수 있도록 넓게 새로 낸 길인 신작로가 생기고 산업화시기와 고도성장기를 거치면서 사통팔달로 도로망이 구축되면서 신라시대 도로 유구는 흔적도 없이 사라져 버렸지만 서당못에서 추령재로 이어진 구간은 개발행위 제한지역이어서 아직도 옛 모습이 남아있어 그나마 다행이다.
선덕여왕 때인 647년 1월 초 상대등 비담 등이 일으킨 ‘비담의 난’을 진압키 위해 김유신 장군이 월성에서 반란군의 소굴인 명활성까지 진격해 물리쳤다고 내용이 삼국유사와 삼국사기 등 사서가 전하고 있다.
김유신이 병사들과 함께 말 달리던 길도 이 길로 추정하고 있다.
현재 조성돼 있는 최고의 트레킹코스인 왕의길은 경주시 황용동 추령재와 기림사를 잇는 함월산 아랫자락 편도 3.9km의 숲길이다.
신문왕(神文王)이 만파식적 피리를 얻기 위해 행차한 길도 왕의길이다. 이 피리를 불면 병이 쾌유되며, 가뭄에는 비가 오고 장마는 개었으며, 바람이 잦아들고 물결이 평온해졌기에 ‘온갖 파도를 잠재우는 피리’라는 뜻의 ‘만파식적(萬波息笛)’을 국보로 삼았다고 기록도 전해지고 있다.
향토사학자 C씨는 “삼국통일을 이룩한 문무왕은 호국룡이 돼 왜적을 막고자 죽은 후 동해 바다에 장사 지내라는 유언을 남겼으며, 신문왕은 선왕의 유언에 따라 경주낭산 능지탑에서 문무왕의 시신을 화장한 후 ‘김유신의길’(가칭)에 이어 왕의길을 통해 봉길리 소재 해중왕릉인 문무왕대왕릉(사적 제158호)에 수장됐을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며 “역사와 스토리 간직하고 있는 천혜의 자연유산인 이 길을 조속히 복원해 경주의 새로운 관광명소로 거듭나도록 경주시에 대책을 요구한다”고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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