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마다 5월이면, 죽장을 오가는 산길 어귀에 오동나무가 연보랏빛 꽃을 피운다. 사람들 눈에 잘 띄지 않는 그 나무는 언제나 그 자리에 조용히 서 있다가, 어느 날 불쑥 꽃을 터뜨린다. 굵고 우람한 줄기에서 솟아오르듯 피어나는 부드러운 꽃송이들. 어색한 듯 조화를 이루는 그 모습은 묘하게 신비롭다. 하얀 꽃들이 많은 초여름 산속에서, 그 연한 보랏빛은 더욱 단정하고 깊게 다가온다.오동나무꽃은 나팔처럼 길고 둥근 모양이다. 가지 끝마다 주렁주렁 달린 꽃들 사이로 가까이 다가서면 은은한 향기가 피어난다. 육중한 몸체에서 이렇게 여리고 고운 꽃이 피어난다는 것이, 언제 보아도 신기하게 느껴진다. 바람에 흩날리는 꽃잎은 마치 무언가를 오래 기다리다 문득 미소 짓는 사람의 눈웃음처럼 보인다.오동나무는 다른 나무들이 잎을 틔우기 바쁠 때 먼저 꽃을 피운다. 늘 조용하지만, 또렷하게. 꽃의 모양이 귀를 닮았다고 해서 ‘귀꽃’이라 불리는 이 꽃은, 이름마저도 순박하고 곱다.한 계절 먼저 피고, 짧게 머물다 스러지는 오동나무꽃. 향은 소박하고, 색은 연하지만 그 담백함이 오히려 더 오래도록 마음에 남는다. 문득 그런 생각이 든다. 우리 삶도 저 오동꽃처럼 은은하되 흔들림 없이 피어났으면. 드러내지 않아도 깊이를 알아보는 이에게는 오래 기억되는 존재였으면. 그리고 언젠가는, 누군가의 마음속에도 고요히 피어 있었으면.어릴 적, 어른들은 오동나무에 얽힌 이야기를 들려주곤 했다. 딸을 낳으면 오동나무를 심고, 훗날 그 나무로 혼수가구를 만든다는 옛이야기. 속이 단단하고 곧아서 가야금이나 거문고 같은 악기를 만드는 데에도 쓰인다며, “오동나무는 아무 데나 심지 않아. 귀한 나무란다.” 그 말을 들을 때면 괜스레 어깨가 으쓱해지곤 했다.오동나무는 천천히 자란다. 속이 비어 울림이 좋으니 악기의 몸통이 되는 것이다. 그래서일까. 이 나무를 바라보고 있으면 ‘기다림’이라는 단어가 먼저 떠오른다. 성급하지 않고, 묵묵히 제 자리를 지키며 제때를 기다리는 나무.오가향에도 오동나무가 있다. 몇 해 전 연못 옆에 뿌리를 내리고는 어느덧 키가 훌쩍 자랐다. 어디서 씨가 날아왔는지는 알 수 없지만, 사람 손길 없이도 스스로 자리를 잡았다. 처음엔 잎만 무성하다고 베어버리려 했지만, 남편이 말려 남겨두었다. 지금은 그 그늘 아래를 지날 때마다 마음이 잔잔해진다. 오동나무는 조용히, 그러나 분명히 자신의 자리를 지키고 있다.전해 내려오는 말에 따르면, 봉황은 60년에 한 번 피는 대나무 열매를 먹고 오동나무에 깃든다고 한다. 오가향엔 대나무도 있으니, 언젠가 봉황이 날아들지도 모를 일이다. 딸이 없어 혼수가구로 쓸 일은 없겠지만, 우리 아들 대에는 이 나무가 또 다른 의미로 쓰일 수도 있겠다. 그래서 나는 매해 이 오동나무가 자라는 모습을 지켜보려 한다. 꽃이 아름답고 향기롭다니, 오가향 한 자리를 내어줄 만큼 충분히 제 몫을 하고 있는 것이다.올해도 오가향의 오동나무에 꽃이 피었다. 봄이 다 저물 즈음에야 그 모습을 드러냈다. 그래서일까. 잊고 있던 무언가가 문득 찾아온 듯한 반가움이 있다. 그 보랏빛 꽃을 바라보고 있으면, 마음속에도 조용한 꽃 한 송이가 피어나는 느낌이 든다.사람이란, 어떤 날엔 오동나무 같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조용히 서서 바람을 견디고, 묵묵히 제때를 기다릴 줄 아는 사람. 겉으론 무뚝뚝해 보여도, 마음 깊은 곳엔 연보랏빛 꽃 한 송이쯤 품고 있는 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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