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도 하늘도 푸른 봄날이다. 천지사방이 눈부시게 푸르다. 숲은 신록으로 우거지고, 길가엔 환한 얼굴의 꽃들이 반겨준다. 아쉬운 점은 이런 봄날이 생각보다 짧다는 것. 그래서 이 계절의 감동은 더 깊이 남는다.요즘 오가향에는 금낭화가 고개를 살짝 숙인 채 매달려 있다. 분홍빛 복주머니를 닮은 모습이 수줍은 듯 정겹다. 곱디고운 한복에 잘 어울릴 것 같은 이 꽃은, 볼 때마다 낯설지 않고 오히려 반갑다.‘금낭화(錦囊花)’는 비단 주머니 모양의 꽃이라는 뜻이다. 꽃잎 끝이 살짝 벌어지며 드러나는 하얀 속살은, 마치 주머니 끈을 풀어 놓은 듯하다. 무엇보다 이 이름이 우리 땅에서 비롯되었다는 점이 감동스럽다. 선조들의 감각이 새삼 놀랍다.금낭화의 꽃말은 ‘겸손’과 ‘순종’. 가지에 주렁주렁 달려 고개를 떨군 모습이 그 뜻과 닮았다. 조용한 기품이 느껴지는 이 꽃은, 그래서 더 특별하게 다가온다.겉모습뿐 아니라 생존 전략도 독특하다. 씨앗에 붙은 ‘종이’라는 하얀 영양덩어리를 개미가 좋아한다. 개미는 씨앗을 가져가 종이만 먹고, 나머지는 땅에 버린다. 그렇게 금낭화는 넓게 퍼진다. 이 식물을 ‘개미살포식물’이라 부른다니, 자연은 참으로 영리하다.이 꽃엔 슬픈 전설도 있다. 한 왕자가 산골 소녀를 사랑했지만 이루지 못하고, 자신의 심장을 찔렀다는 이야기. 그래서 붙은 영어 이름 Bleeding Heart. 꽃 모양도 하트처럼 생겼다. 이름부터가 애틋하다.장아지매는 붉은 금낭화보다 흰 금낭화를 좋아한다. 청아한 분위기 덕분이다. 하지만 흰 금낭화는 잘 자라지 않는다. 생명력이 약해 번식도 어렵다. 식물도 고운 꽃일수록 연약한 걸까. 반면 수수한 꽃은 제법 억세게 살아간다.이처럼 금낭화는 숨겨진 보물처럼 다가온다. 예쁜 이름, 전설, 꽃말까지 지닌 이 꽃은 마음을 먼저 사로잡는다. 아이들 눈엔 ‘하트꽃’처럼 사랑스럽고, 어른들 눈엔 고요한 침묵이 더 깊게 남는다.장아지매는 처음 금낭화를 봤을 때, 그 안에 사연이 있을 거라 느꼈다. 꼭 닫힌 주머니 같은 꽃송이, 바람에도 흔들리지 않는 줄기. 여려 보이지만 단단한 모습 속에 무언가 감춰져 있을 것 같았다.어느 해 봄, 금낭화를 심고 매일 그 앞에 앉았다. 꽃은 쉽게 말을 열지 않았다. 며칠, 몇 주가 지나고 나서야 어렴풋이 알게 됐다. 금낭화는 보여주기 위해 피는 꽃이 아니라, 감추기 위해 피는 꽃이라는 걸. 다 드러내지 않아도 아름다울 수 있다는 걸.세상은 점점 더 많은 말과 표정을 요구한다. 더 강렬하게, 더 화려하게 드러내야 살아남는 시대. 그 속에서 금낭화는 조용히 피고 조용히 진다. 존재만으로도 충분한 꽃. 누구를 끌어들이거나 밀어내지 않고, 그저 자기 자리를 지킨다.장아지매는 아직 금낭화의 모든 비밀을 알지 못한다. 하지만 그 침묵 앞에서, 나 역시 말을 줄인다. 어쩌면 그것이 이 꽃이 전하고자 하는 가장 깊은 메시지일지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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