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오가향엔 꽃들이 앞다투어 피어난다. 미니수선화가 앙증맞은 자태로 고개를 내밀고, 장독간 주변엔 빨간 튤립이 햇살을 머금은 채 고혹적인 빛을 뽐낸다.  그 앞에 서면 나도 모르게 `와!` 하고 탄성이 터져 나올 정도지만, 정작 그들의 환대를 길게 받아줄 여유는 없다. 왜냐하면 연둣빛을 쏟아내는 봄산이 자꾸만 발길을 부르기 때문이다. 그 유혹 앞에서 장아지매는 늘 기꺼이 길을 잃는다.봄나물에 대해서 잘 알지는 못한다. 하지만 두릅만큼은 자신 있다. 어릴 적 엄마와 밭을 매고 들어오다가 산기슭에 얼굴을 내민 두릅을 보았다.  엄마가 얼른 따자고 했던 기억 때문일까, 손끝으로 만져지는 그 도톰한 감촉은 오래도록 잊히지 않는다.    봄이면 어김없이 산길을 오른다. 어떤 날은 능선 쪽을, 어떤 날은 계곡을 따라 오른다. 오늘처럼 비가 온 다음 날에는 어김없이 계곡 쪽을 택한다. 비가 씻어낸 숲길은 언제나 더욱 선명하고 생생하다. 졸졸 흐르는 물길 옆으로 푸릇한 생명이 기지개를 켠다. 바위틈에서, 낙엽 사이에서, 가느다란 줄기 끝에서.계곡물 소리는 장아지매의 마음을 깨끗이 씻어주는 특별한 약수다. 그 소리만 들어도, 마음 한켠에 쌓였던 피로와 번민이 서서히 풀려나간다. 뿌연 걱정이 투명한 물빛으로 변해가는 기분이다.    그 물소리를 친구 삼아 한 걸음 한 걸음 오르다보면, 어느 순간 눈에 확 들어오는 노란빛이 있다. 처음엔 조심스레 다가오다가, 어느새 계곡을 따라 흐드러지게 퍼진다. 마치 산 전체가 노란빛을 입은 듯, 눈부시게 피어난다. 연둣빛 새싹과 어우러진 그 색은 말로 다 담을 수 없을 만큼 황홀하다.그 이름을 찾아보니 ‘피나물’이다. 한참을 들여다본다. 노란 나비처럼 가벼운 꽃잎들이 바람에 따라 살랑거린다. 그런데, 이렇게도 곱고 환한 꽃 이름이 ‘피나물’이라니. 마음 한편이 걸린다.    이유를 알아보니 줄기를 자르면 붉은 즙이 배어나온다고 한다. 피처럼 보인다고 해서 붙은 이름이라니, 생명의 환희 속에 깃든 아픔이 느껴진다. 문득, 그 붉은 즙이 정말 피처럼 보일까 궁금해지지만 꺾지 않기로 한다. 상처 없는 생명이 어디 있으랴마는, 굳이 고운 것에 아픔을 더하고 싶지는 않다.피나물이라고 나물이라는 이름이 붙었지만 독성이 있어 먹을 수는 없다. 하지만 봄마다 환한 얼굴로 나와서 나물 이상의 미소를 던진다.노란 피나물 꽃은 단정하고도 강렬하다.    다른 색은 단 한 방울도 섞이지 않은, 순도 높은 봄의 빛깔이다. 그 빛깔을 보고 있자니 마음이 정화된다. 하지만 안다. 다음에 다시 찾아오면, 그 자리에 그 꽃은 없을 것이다. 계곡은 또 다른 꽃으로 물들어 있을 테고, 장아지매는 다시 새로운 이름을 부르며 감탄하고 있겠지.    그렇게 자연은 언제나 가고, 또 오며, 쉼 없이 교차한다. 아름다움은 머물지 않고, 지나간다. 그러나 그것이 사라진 것은 아니다. 다음 생명을 위해, 다음 계절을 위해 자리를 내어주는 것이다.나는 생각한다. 이 자연의 순환처럼, 우리의 삶도 그렇게 되면 얼마나 좋을까. 지난 계절이 다시 돌아오고, 놓친 순간을 다시 마주할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하지만 인간에게 주어진 시간은 단 한 번뿐이다.    단 한 번 피었다 지는 피나물꽃처럼, 우리의 봄도 그렇게 스쳐 지나간다. 그러니 오늘의 봄을, 오늘의 꽃을, 지금의 기쁨을 더 사랑하며 살아야 한다. 때론 무심코 지나치는 꽃 한 송이가, 우리 인생의 귀중한 깨달음을 건네주기도 한다.오늘은 노란 피나물꽃이 내게 말을 걸었다. 상처를 숨기고도 환하게 웃을 수 있다는 것, 짧은 생애에도 기꺼이 피어날 이유가 있다는 것, 그리고 다시는 돌아오지 않을 오늘을 사랑하라고. 꽃이 전하는 그 말에, 마음이 깊어지는 봄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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