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월이 변하고 시류에 편승해 한 몫 챙기려는 이속만이 가득한 세상이라서 그럴까? 주위를 둘러봐도 영남 선비의 핏 속을 면면히 흐르던 우환의식(憂患意識)을 찾아보기가 힘들다. 그 대신 불안과 근심이 대의에 이르지 못하고 개인 영달에만 매달린 속유(俗儒)만이 득실거리는 세태다. 경북과 안동이 선비정신의 본 고장이라면 다른 지역과는 뭔가 좀 달라야 하지 않을까? 상고하기로 통유(通儒)의 근심이란 개인의 영달을 넘어선 공동체의 번영에 있었기에 영남 유림은 사회가 시대적 소명을 담아내지 못할 때마다 과감하게 목소리를 냈다. 안동과 경북이 전국에서 가장 많은 독립운동가를 배출하고 자정순국 지사가 가장 많은 까닭 또한, 이곳이 바로 신독(愼獨)과 계신공구(戒愼恐懼)의 고장이기 때문이다. 국가와 민족에 대해 선비가 품고 있는 올바른 헌신과 정의감이 우환의식을 낳았고 그 계신공구 의식이 혁신유림의 길을 통해 독립운동가와 자정순국자를 배출하였을 뿐만 아니라 영남만인소를 올리는 실천으로 이어졌던 것이다. 1689년 숙종이 남인을 축출한 갑술환국 이후 조선이 멸망하는 221년 동안 기울어진 운동장을 바로잡고자 영남유림은 총 7차례의 만인소를 올렸다. 노론 정권의 일방적 독주에 맞서 동서 인재의 고른 등용을 통한 국가 균형발전을 꾀했던 영남유림의 고뇌가 영남만인소에 고스란히 담겨 있다. 사도세자 추존을 통한 영남유림의 활로를 모색했던 제1차 영남만인소가 안동 유생 이우를 소두로 1792년 윤4월 27일과 5월7일 두 번에 걸쳐 조정에 전달되었을 때 얼마나 감격했던지 정조는 ‘차마 말을 잇지 못했다’고 한다. 훗날 도산서원에서 치러진 도산별시는 영남만인소에 대한 보답 성격으로 남인 인재를 등용하겠다는 정조의 의지였다. 2차 영남 만인소는 서얼철폐에 관한 것이었고 뒤이어 위정척사의 7차까지. 나라를 지키려는 영남유림의 우환의식은 조선왕조가 멸망하는 그날까지 끊이지 않고 이어졌다. 그리고 독립운동에 이르기까지. 하지만 위대성은 거기까지였다. 근대 이후 역사의 고비에서 영남유림이 도도한 역사의 물줄기에 동참했다는 흔적이 잘 보이지 않는다. 5.18 광주민주화운동은 물론 전두환 대통령의 호헌 선언에도 귀를 닫았다는 뼈아픈 전력만이 도드라져 보일 뿐이다. 그리고 두 번의 대통령 탄핵과 여러 번의 대선에도 영남 유림은 의중을 드러내는 법이 없었다. 안동 출신 이재명이 지난번과 이번에 걸쳐 대통령 선거에 출마했는데도 안동과 경북의 정치 리더와 유림의 인사들은 이상하리만치 아무런 의견 표명을 하지 않았다는 것이 그 한 예일 것이다. 왼고개만 친 채 누가 되든 당선자만을 버선발로 마중하는 처신으로는 영남유림의 우환의식은 무덤 속에 잠자는 고혼(孤魂)일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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