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연된 정의는 정의가 아니다.” 이 오래된 경고가 지금, 포항에서 현실이 되고 있다.2017년 11월, 경북 포항을 강타한 규모 5.4의 지진은 단순한 자연재해가 아니었다. 이는 인근 지역에서 진행된 지열발전사업이 촉발한 ‘인재’로 밝혀졌다. 이후 정부는 지열발전을 전면 중단했고 지진도 멈췄다. 하지만 지진은 사라졌어도, 시민들의 삶에는 여전히 균열이 남아 있다.시간이 흐르며 기억은 흐려졌지만, 아직도 많은 시민들은 작은 이상 징후에도 공포에 휩싸인다. 정서적 충격은 물론, 수많은 가옥과 상가가 붕괴되거나 균열을 입었고, 재산 피해도 컸다.그럼에도 피해에 대한 적절한 보상은 여전히 요원하다. 일부만이 인정받았고, 다수의 시민은 소송이라는 고단한 절차에 의지할 수밖에 없었다.소송은 피해자가 자신의 권리를 회복하기 위해 선택하는 최후의 수단이다. 국가는 시민이 사적 복수나 자구행위를 선택하지 않도록 공정한 재판 시스템을 보장해야 한다. 그러나 이번 포항지진 위자료 소송은 그 정의의 속도가 얼마나 느릴 수 있는지를 여실히 보여준다.지진 피해 발생 8년, 손해배상 소송 시작 7년. 아직도 항소심이 진행 중이다. 2023년 11월, 대구지방법원 포항지원은 “국가와 관련 업체가 1인당 200만~300만 원의 위자료를 지급하라”는 1심 판결을 내렸다. 하지만 정부는 이에 즉각 항소했고, 재판은 다시 지체되기 시작했다.현재 쟁점은 ‘지열발전과 지진 사이의 인과관계’다. 아이러니하게도, 이는 정부가 구성한 조사연구단이 과학적으로 이미 입증한 사안이다. 수십억 원을 들여 세계적 석학들과 함께 규명한 내용을, 정작 정부가 법정에선 신뢰하지 못하겠다는 입장을 취하고 있는 셈이다.문제의 본질은 더 이상 법리나 해석의 영역이 아니다. 지열발전이 지진을 촉발했다는 사실은 과학적으로 입증된 사실이다. 이를 다시 법정에서 되풀이하며 시간을 끄는 건, 피해자들에게 이중의 고통을 안기는 일이다.소송은 단순한 논리 싸움이 아니다. 인간의 삶이 걸린 문제다. 이미 소송 과정에서 2만 4천여 명의 피해자가 세상을 떠났다. 그들은 정당한 보상과 사과를 받지 못한 채 생을 마감했다. 그 어느 정의보다 빠르게 이뤄졌어야 할 정의가, 가장 느리게 오고 있는 셈이다.국가를 상대로 한 손해배상 소송은 다른 유사 사례에도 영향을 줄 수 있고, 정책적 책임이 수반되기 때문에 보통 쉽게 끝나지 않는다. 항소와 상고는 거의 관례처럼 반복된다.그러나 이는 어디까지나 ‘판례를 남기기 위한 법적 절차’일 뿐, 피해자들의 고통은 고려되지 않는다.만일 이번 사건이 대법원까지 이어진다면, 남아 있는 많은 고령 피해자들조차도 최종 판결을 보기 어려울 수 있다. 그럴 경우, 법원이 인정한 위자료는 결국 아무 역할도 하지 못한 ‘무용지물’이 될 수 있다.조희대 대법원장은 최근 취임사에서 재판 지연 문제를 사법부의 가장 시급한 과제로 지목하며, 이를 개선하겠다는 의지를 밝혔다. 이제 그 말이 실천으로 이어져야 한다. 지금 법원이 해야 할 일은 명확하다. 기일을 무리하게 당기지 않더라도, 불필요하게 늦추는 일만큼은 반드시 막아야 한다.법은 정의를 구현하는 도구이자, 국가의 신뢰를 담보하는 장치다. 이제 포항 시민들이 바라는 것은 그저 "제때 오는 정의"다. 그것이 곧 진짜 정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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