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동 서미리에 있는 서간사는 청음 김상헌을 기리는 서원이지만 단출하기 그지없다. 제사와 강학 공간없는 집 한 채만이 퇴락 한 채 덩그렇게 남아 있는 현실은 우리 정치사의 한 단면을 보여주는 것 같아 씁쓸하기까지 하다.
국가의 원상으로 한 시대를 풍미했을 뿐만 아니라 삼수육창으로 상징되는 그의 후손과 학맥이 조선 후기 250년 정치사를 좌지우지 했다는 점에서도 턱 없이 초라하고 볼품없는 대접이 아닐 수 없다.
안동 지역 남인은 청음과 같은 피를 나누었음에도 그가 서인의 영수라는 이유로 서원이 지어질때마다 번번이 야밤에 떼로 몰려가 서간사를 허물어 버렸다.
그 결과가 도산서원이나 병산서원과는 달리 청음의 서간사는 지금도 초라한 몰골로 허물어져 가고 있다. 통탄할 일은 수백년이라는 시간이 흘렀음에도 오래된 반목이 치유되기는커녕 더 단단한 증오로 채워지고 있다는 것이다.
얼마전 이재명 대표가 고향 안동을 비롯하여 청송-영양-산불 현장을 찾았다가 일부 주민으로부터 옷으로 위협받고 막말 테러를 당한 사건은 오랜 반감의 정치 문화가 빚은 불행한 사태가 아닐 수 없다.
지난 대선 기간 청음의 후손인 김혜경 여사가 소산마을 안동김씨 대종택 양소당을 찾으려다 불발된 사건도 끊어내어야할 반목의 부끄러운 역사가 아닐 수 없다. 비록 청음과 그의 후손 장동파 안동김씨들이 정치적으로 당파가 달랐다고 하나 그들이 고향 안동을 흠모한 흔적은 기억해야할 역사가 아닐 수 없다.
김수근-김학순-김응협-김가진은 청음의 후손이면서 안동부사를 역임한 인물들이다. 그들은 하나같이 선조와 자신들의 터전이 안동이라는 것을 잊지 않았다. 청음은 인조가 세자와 대신 3백여명을 데리고 삼전도에서 홍타이에게 항복의 삼배구고두례를 행할 때 홀로 참석을 거부하고 고향 안동으로 내려와 끝까지 청나라에 항거했다.
심양으로 끌려가면서 쓴 ‘가거라 삼각산’으로 시작하는 그의 시조는 안동김씨 소산마을 초입에 시비로 세워져 있다. 육사를 안동으로 가져오겠다는 의지에서 보듯 이재명 대표의 가슴 한편에 고향 안동이 살아 있는 한 안동인이 청음 김상헌에게 했던 모진 역사를 굳이 되풀이해야 하는지 묻고 싶은 심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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