함창오봉산에 있는 ‘남산고성’은 고대토성으로써 산성에서 내려다보면 눈아래 낙동강과 함창 시가지가 보이고 고분군 산록이 들어온다.
남산고성의 중요사항은 낙동강 서안에 위치하고 충북 보은의 삼년산성보다 훨씬 앞서 축성됐다는 사실이다. 보은의 삼년산성은 신라가 백제와 대치하면서 쌓은 것으로 축성 시기가 신라 20대 자비왕 13년 서기 475년이다. 석성으로써 높은 곳은 7~8m에 달하며 성벽두께는 3~4m에 이른다. 그에 비해 남산고성은 토성으로써 윤곽은 뚜렷하지만 천년이상 방치된 상태로 개축한 흔적이 없다. 신라가 이 지역을 점령한 후로 방어나 공격 기지로써의 역할을 상실한 것이다. 한편 남산고성은 오봉산 고분군과는 뗄 수 없는 공동의 운명을 가지고 있다. 낙동강 서안에 위치한 상주·문경의 성들을 보면 모두 고분군과 한 셋트로 이뤄져 있다. 상주병풍산성, 함창남산고성, 용궁원산성, 예천흑응산성 등이 그렇다. 이는 상주, 문경, 예천 뿐 아니라 김해, 고성, 함안, 고령, 성주 등 5가야 6가야에서 필수조건일 만큼 고분과 산성은 같이 붙어있다. 이 들 산성의 역할은 조상들의 사후세계를 수호하며 그들과 정신적 물리적으로 연결되는 그들의 도시를 지키는 것이었다. 견훤산성이나 고모산성, 마고산성 등은 상주 문경에 있는 성이지만 석성으로써 그 입지조건이 전혀 다르다. 낙동강 서안에 있는 이들 토성들이 신라성이 아닌 것은 삼척동자도 알 수 있다. 첫째 강 건너 신라 쪽을 방어하기 위한 기지로써 신라 입장에서는 강 서쪽에 쌓을 이유가 전무하다. 신라가 강 서쪽지방을 점령한 후 오랜 세월 개축하거나 신축한 흔적을 전혀 발견할 수 없다.충북 보은 삼년산성은 신라가 상주지방을 점령한 후 강역을 넓히면서 쌓은 성이다. 삼년산성의 축성시기가 475년임을 감안하면 남산고성은 최소한 3~4백년 전에 축성했을 것으로 짐작할 수 있다. BC 57년 서라벌에서 6부촌장이 박혁거세를 옹립해 신라를 건국하고 서쪽 낙동강으로 세력을 확장했다. 결국 가야제국을 차례로 무너뜨리고 백제와 국경을 마주하게 된 기간이 4~5백년 걸린 셈이다.
삼국사기에서는 첨해왕 10년 서기 250년에 사벌국을 점령하고 사벌주로 만들었으며 호민 80여 호를 동해안 사도성으로 이주시켰다고 문헌에 나온다. 특히 사벌국 호민의 후예 중 중요한 인물이 함창 김씨 김택으로 고려말 대찬성 벼슬을 했으며 사위가 가정 이곡이며 그 아들이 목은 이색 선생이다. 조선시대 제작된 함창현지에는 남산고성이 가야시대 지어진 것이라고 기록돼 있다. 신라가 멸망시킨 사벌국이 고녕가야일 가능성이 농후하다. 남산고성이 사벌국 멸망 전에 건축됐음을 가정할 때 그 시기는 대략 서기 전후가 되며 고분 조성도 이 때부터 이뤄진 것이다. 특히 함창 오봉산 고분에서 가야전형의 철갑투구와 갑옷이 출토됐으며 병풍산 고분에서는 초기 철기유물이 다량 출토됐다. 따라서 고녕가야 권역인 남산고성이 가야시대 축성됐으며 초기 철기유물과 가야전형의 투구가 출토 된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유물·유적이 출토되지 않아서 고녕가야를 인정할 수 없다는 박천수 경북대 박물관장과 윤호필 상주박물관장의 견해는 상식적으로 납득할 수 없다. 또한 앞서 이병도, 김태식, 이영식이 주장한 함창고녕가야를 부인하는 이론적 토대도 수준 이하임은 말할 것도 없다. 일제강점기 식민사학자들은 가야고분에서 나온 거의 모든 토기를 5~ 6세기 제작으로 결론내렸다. 이는 임나일본부 즉 일본이 4~6세기 한반도 남부를 지배했으며 그때 한반도 남부에는 고대국가가 없었다는 이론을 만들기 위한 궁여지책이다. 1세기에서 4세기까지 삼국사기, 삼국유사 기록은 신빙성이 없으므로 일본서기를 기준으로 한다면서 지금까지 그 이론이 내려오고 있다. 그들은 한반도 남부를 임나라 명명하고 임나가 곧 가야라고 말한다. 그렇지만 함창고녕가야는 한반도 남부가 아니며 더군다나 4~6세기가 아니라 1세기에 건국돼 3세기 중엽에 멸망했다. 한편 사료와 사적이 차고 넘치는 함창 고녕가야역사를 부인하는 자들의 정체와 의도가 무엇인지 충분히 짐작할 수 있으며, 고녕가야 역사의 진실이 하루뻘리 확실히 밝혀지기를 간절히 기대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