낙동강 중상류지점인 안동에서부터 하류로 수만기의 고분이 산재해 있음을 필자는 확인했다.
산정횡혈식 돌방무덤으로 지하에 직사각형으로 돌을 쌓고 위에는 넓은 판석을 얹고 그 위에 흙으로 봉분을 쌓았다. 판석의 두께와 넓이, 석실의 넓이와 높이 등 약간의 차이는 있지만 무수한 고분들이 낙동강 수계에 분포하고 있다. 경주분지에 산재해있는 고분은 적석목곽분으로 나무관에 시체를 안치하고 그 위에 돌무더기를 쌓는 형식으로 산정횡혈분과는 판이하다. 낙동강 수계에 주로 분포하며 전라도 남원과 장수등에 일부 산재한다. 상주병풍산에는 봉분을 그대로 둔 채 구멍만 뚫어 도굴한 무덤이 많은데 그런 무덤은 내부 원형을 간직하고 있다. 봉분이 살아있는 것은 석실 내부를 보존한 상태로 발굴, 정비하는 것을 고려해 볼 만하다. 상주병풍산과 오봉산, 예천 봉덕산 고분의 내부영상을 확인해보면 석실 내부가 상당히 크다. 진주 운천리고분과 안동 조탑동고분에는 직접 석실내부에 들어가 보았다. 옛 모습 그대로 돔 형식으로 단단하게 조성됐으며 스무 사람 이상이 들어가 앉을 정도로 큰 규모였다. 안동 회곡리고분은 석실내부가 좁고 길며 높이도 봉분에 비해 낮게 조성됐다. 또한 같은 안동이라도 조탑동, 임하리, 회곡리의 무덤형식이 조금씩 형태의 차이를 보이고 있다. 판석은 상주나 함창은 얇고 넓직한 반면 안동지역은 두껍고 기구를 써서 절단한 형태가 잘 나타난다. 예천과 문경의 판석은 상주보다 두껍고 안동보다는 얇지만 크기가 크다. 아득한 옛날부터 낙동강을 터전으로 동일문화권을 형성한 가야 제국이거나 아니면 7~8천년 전부터 살아온 토착세력일 가능성을 점쳐본다. 함창오봉산에는 육안으로 확인할 수 있는 고분이 100여 기 이지만 지표 조사결과는 700여 기라고 한다. 상주병풍산에는 지표조사된 것이 1000여 기며 조사되지 않은 것까지 합하면 1500여 기가 된다. 예천 봉덕산에도 육안으로 확인한 것이 200여기, 안동 조탑동에 수백여 기가 된다. 풍산면 회곡리 뒷산에서 300여 기, 안동천전리 앞산에서 100여 기, 임하면 소재지 뒷산에서 100여 기가 노출돼 있다. 문경에는 왕태리 뒷산에 백여 기, 용궁 원산성아래 수십여 기가 흩어져 있다. 선산, 성주, 고령, 창녕, 함안, 진주, 고성 등에 수 만여 기 고분이 흩어져 있다.특히 상주병풍산에는 초기철기유물이 발굴됐으며 함창오봉산에는 가야식 투구와 철갑옷, 철 마구가 출토됐다. 예천 봉덕산에는 가야토기 전형인 원뿔형태의 그릇받침과 금동제 귀고리가 출토됐다. 상주, 함창고분에서 나온 유물은 4차선 도로를 개통하면서 급히 발굴한 것이며 예천고분은 창고를 지으면서 소규모로 발굴한 결과물이다. 일제 강점기 일인들이 식민지 정책의 일환으로 발굴을 주도했으며 나머지는 대부분 도굴됐다.
발굴한 유물은 모두 일본으로 빼돌렸으며 그 목적은 오로지 임나일본부를 증명한다는 명분이었다. 수천기의 무덤을 파헤쳤지만 임나일본부에 대한 단서는 커녕 가야의 문화가 일본으로 넘어갔다는 증거가 무더기로 나왔다. 근래들어 국내 학자들의 주도로 발굴이 이뤄 지지만 일인들의 역사인식을 그대로 답습하고 있다. 우리사서의 기록을 무시하고 고령대가야를 기점으로 아래는 임나일본부 소속이고 위쪽은 진한의 소국이라는 것이다. 안동 박물관에는 고대자료를 한 건도 볼 수 없으며 예천이나 상주박물관에도 토기류 20여 점 정도를 형식적으로 전시한 것 뿐이다. 수백억원을 투자한 박물관에 지역의 유물을 확보해 전시하는 것이 당연한 일이다. 더군다나 어렵사리 발굴한 유물이라면 타지로 유출되는 것을 막아야 한다. 도시의 위상을 결정하는 것은 단순히 공업발전이나 경제상황만은 아니다. 지금이라도 유출된 유물은 반입하고 발굴팀에서 연구목적으로 방출한 유물도 연구를 마쳤으면 회수해야 한다. 아직 도굴되지 않은 고분도 상당수 있으므로 제대로 발굴해서 영남내륙의 웅혼한 고대 역사문화를 규명해야 한다. 낙동강 수계의 고대역사를 규명하는 것은 나라의 근간을 찾는 일이며 경제를 살리는 지름길이다. 하루빨리 잃어버리고 빼앗긴 낙동강의 역사가 만천하에 드러나기를 온 힘으로 경주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