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연... 그 소중한 고마움>으로 오래 전, 처음으로 경상매일신문 칼럼으로 실렸다. 2019년 11월부터 실린 이래 벌써 3년이 훌쩍 지났다. 그간 개인적으로 너무 소중하고 분신과도 같은 이 칼럼을 오늘 이제 접으려고 한다. 그렇게 생각하며 컴퓨터를 켜고 보니 몇 시간째 묵묵히 글을 이어나갈 수 가 없다. 지난 시절 작성한 글들이 주마간산처럼 떠올랐다. 무엇보다 이글을 쓸 수 있도록 지켜봐주신 수많은 독자 분께 감사드리고 싶었다. 글 쓰는 재주도 없고 재미도 감동도 없는 이공계 연구원의 글을 읽고 칭찬해시거나 공감해 주신 분, 또한 격려를 건네주신 분들께 먼저 고개 숙여 감사드린다.그리고 지면을 내어주신 천기화 회장님, 이종근 부사장님, 허경태 편집 상무님께 감사드린다. 처음 글은 살면서 맺은 인연, 그 고마움에 대해 적기 시작했다. 그러다 과학칼럼을 자처하며 삼겹살과 빛의 스펙트럼, 미생물이 가공하는 작은 기계공학의 세계를 소개하고 싶었다. 사실은 신문지면을 통해 적절한지는 모르겠지만 꼭 소개하고 싶은 개인사가 있어 칼럼 지면에 감사했다. 몇 년의 세월동안 글을 쓰다보면 필자의 진정성을 알고 그것도 허락해 주지 않을까 하고 시작했다. 이제 마지막 칼럼에서 그 글을 남기려 한다. 참, 그전에 칼럼 큰 타이틀로 나가는 제목이 무척 송구하다.박사학위를 받고나자마자 잃어버리는 것이 있다. 박사 명칭이다. 앞으로 자신의 입으로 박사라면 안 되는 불문율 같은 것이다. 남들이 불러주면 어떨지 모르지만 스스로가 입에 올리면 곤란하다고 선배들에게 배웠다. <인연 그 소중한 고마움>이라는 제목으로 첫 원고를 보내자 지금은 퇴사하신 존경하는 허경태 편집 상무님께서 큰 제목을 정해주셨다. 아. 큰일이다. <정상태 박사의 세상사는 이야기>였다. 그분이 만들어주신 제목이 조금 당황스러웠고, 선배들이 만류하던 조언과 어긋났다. 자신의 칼럼에 박사라는 제목이 그러하니 살짝 부끄럽기도 해서, 이 점 먼저 양해를 구하고 싶다.정확히 3년 6개월 이 지면을 통해 이런저런 세상사는 이야기를 적었다. 이제 마지막 개인사를 올리며 이 칼럼은 창을 닫으려한다. 향 후 신문사에서 다시 허락을 하시면 다른 제목으로 찾아뵙고 싶다. 이 칼럼은 나의 분신으로 소중히 오랫동안 보관하고 싶다. 1960년대 지독히도 가난한 집에서 태어났다. <하꼬방>이라는, 그냥 집도 아닌 박스 떼기 같은 도시 빈민촌에서 자랐다. 먹을 것도 부족하고 미래가 안보이던 시절, 열심히 살며 공부를 해야 할 의무가 생겼다. 그것은 무척이나 착한 누이 때문이었다. 살아계신다면 양띠, 지금 7순에 가까운 분이시지만 꽃다운 20대에 생을 마감하셨다.전쟁영웅으로 국가의 외면을 받고 몸져누운 아버지를 대신해서 야간중학교, 야간고등학교를 다니며 낮에는 방직공장, 급사로 밤에는 학업을 열중해 오시던 분이셨다. 늘 자신보다 어린 나에게 집안을 일으켜 세우자는 말씀을 주셨다. 공부도 잘했고, 참 예쁘고 다정하고 자기희생적인 분이셨다. 교직원으로 자신은 굶어도 점심값으로 가족의 저녁을 해결할 수 있다고 했다. 그 분의 지원으로 학업을 이어나갔던 나는 누나가 건네는 용돈으로 친구들과 밥을 사며 즐거워했다. 그 돈이 참으로 힘겹게 번 돈이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을 때도, 동생을 위해 베풀기만 하셨던 그분의 배려에 눈물이 난다.군 입대 전 날 식사자리, 누나가 함께한 지인에게 여자 친구라며 와줘서 고맙다며 인사했다. 그렇게 떠나던 입대 날 아침. 고속터미널에서 웃으며 날 보내며 돌아서던 누나. 버스가 다시 돌아 차안에서 신호등을 붙들고 있는 그분의 눈물을 보았다. 그렇게 서럽게 목적지까지 울면서 입대를 했다. 휴가를 나왔다. 엄마가 집 앞에서 망연자실 나를 기다리다 울면서 말씀하신다. “너거 누부 세숫대야 3개나 피를 토했다. 죽을란갑다.” 누나를 들쳐 업고 대구동산병원에 입원시켰다. 의사선생님께 울면서 엎드려 큰절을 했다. “우리 누나 부탁한다고...” 그러자 의사 선생님께서 말씀하셨다. “누나는 내가 잘 돌볼테니 군인아저씨는 나라 잘 지키시라고..”힘겹기만 하던 시절, 새벽 당직사관의 비보를 접했다. 급히 대구로 내려왔다. 호흡이 급하고 팔이 마치 젓가락 3개 정도를 묶어놓은 듯 가녀린 팔이 떨리기 시작했다. 엄마가 말씀하셨다. “상태야. 이제 누부 입을 옷 사러가자.” 서문시장에서 삼베로 된 수의를 본 순간 그 자리에 주저앉아 한참을 울었다. 누나는 내게 부모였고, 정신적인 스승이었다. 그리고 늘 따뜻하고 자상함 그 자체였다. 사인은 오랜 시간 먹지 않고 가족을 돌보느라 영양실조에 따른 뇌막염으로 20대 후반 꽃다운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누나의 마지막은 대구 화장장에 적힌 고인의 이름으로만 남았다. <정 점숙>그 순간, 아버지는 영남대학교 병원 중환자실에서 생사를 넘나드는 사투를 벌이고 계셨다. 사실 공부를 해야 하는 이유가 있었다. 출세를 하고 싶었다. 그래서 누이 이야기를 남기고 싶었다. 가난한 집안에 태어나 야간학교를 다니며 어려운 집안을 이끌다 끝내 젊은 나이에 요절하신 분. 꽃다운 그녀의 인생을 지켜본, 그녀의 삶을 세상 사람들에게 남기고 싶었다. 그 기회를 이 곳 경상매일신문에서 만났다. <인연, 그 소중한 고마움>을 이야기 할 기회를 주셔서 감사하다. 그 동안 부족한 제 글을 읽고 사랑해주신 모든 독자 분께도 감사드리며 행복했다는 말씀을 드리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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