벨테브레는 1627년(인조 5)에 표착하였고, 조선에 귀화하여 조선 여인과 결혼하여 1남 1녀를 두고 훈련도감 관리로 벼슬살이를 하면서 병자호란 때는 전투에 참전하였다. 하멜이 표착한 시점에는 벨테브레는 조선의 훈련도감에서 중국에서 수입된 홍이포의 제작과 조종법을 가르치는 교관이었다. 그는 조선에 정착한 최초의 유럽인이었다. 하멜이 제주에 표착할 당시 제주도의 행정 구역은 제주목과 대정현, 그리고 정의현의 3개 구역으로 나뉘어 있었다. 대정현에서 체포된 하멜 일행이 제주목사가 집무하는 제주목 관아로 이송되는 과정을 하멜의 기록에는 이렇게 적혀 있다. “오후에는 모흐안(Moggan)이라는 도시에 도착했다. 그곳은 조선인들이 목서(Mcoxo)라 불리는 총독의 관저가 있는 곳이다.”라고 하였는데, 여기의 모흐안은 ‘목관아(牧官衙)’를 들은 대로 적은 것 같다.    제주에 표착한 이래 앞길이 참담함을 알게 된 하멜 일행은 제주에 머무르는 동안 조선의 작은 배를 훔쳐 1차 탈출을 시도했으나 실패하였고 이 후 한양으로 압송되어 어전으로 불려갔다. 효종은 이들을 직접 심문하였는데, 하멜은 효종을 알현한 자리에서 일본의 나가사키로 갈 수 있도록 송환 조치해 줄 것을 요청하였다. 이 시기에 조선 조정은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을 겪은 후였으므로 표류한 서양인들에게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 그것은 주로 표류한 서양인이 무기 제조기술을 습득하고 있는 지에 대한 것이었다. 즉 이들이 지닌 문물과 지식이 조선의 무기개발에 도움이 될 것으로 기대한 듯하다. 벨테브레는 당시 조선의 훈련도감에 소속되어 일본인 포로와 청나라에서 도망 온 귀화 병사들을 관리하며 이들을 집단적으로 훈련시키는 교관의 임무를 맡고 있었는데, 1648년에는 무과시험에 장원으로 합격하여 무관으로 활동하기도 하였다. (인조실록, 인조 25년 8월 25일, 設庭試取文科 李廷夔等九人, 武科 朴淵等九十四人) 벨테브레가 조선에서 이런 좋은 대우를 받을 수 있었던 것은 그가 네덜란드 상선의 부관으로 있으면서 화포를 다루는 상당한 기술의 소유자였기 때문이었다.  이 당시 서양의 상선들 중에는 무역을 위해 배에 대포 등 무기를 싣고 다니며 타국의 상선을 나포할 수 있는 권리를 자국으로부터 부여받고 있는 경우가 많았다. 이러한 배를 당시에는 사략선(私掠船)이라 하였는데 사략선을 해적선의 일종으로 보는 견해도 없지 않다. 여기서 표류한 서양인들을 필요로 했던 조선 조정의 입장에서 벨테브레와 하멜 일행을 비교해보자면, 벨테브레가 사략선의 부관으로서 상당한 수준의 무기 제조기술을 가졌던 데 비해, 항해 기록관이었던 하멜은 무기에 대한 지식이 벨테브레 보다는 많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한양에 체류하는 동안 이들은 장안의 화제 거리가 되었는데, 이들이 괴물이라는 소문이 퍼지기 시작하였다. 조선 고관들의 집에 불려 다니면서 그들이 지닌 재주를 내보이고 식량을 얻기도 했다. 네덜란드의 노래와 춤을 선보이며 조선인들의 비위를 맞추어야 했다.  
주메뉴 바로가기 본문 바로가기
▲ 제보하기
[메일] jebo@ksmnews.co.kr
[카카오톡] 경상매일신문 채널 검색, 채널 추가
유튜브에서 경상매일방송 채널을 구독해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