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주말은 봄비를 맞으며 경주 남산을 거닐었다. 남산은 전체가 화강암이고, 고운 마사토 산길로 비가 와도 흙이 묻지 않는 곳이다. 오전 9시. 선후배와 만나 포항을 벗어나 경주 통일전, 서출지를 지나 남산동 주차장에 차를 세우고 카페 ‘늘人’에 들린다. 서출지(書出池)는 신라 21대 소지왕이 천천정에 행차할 때 목숨을 구한 편지가 나왔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으로 연못 서편에는 조선 시대(1664년 현종 5년) 남산 임씨의 입향조인 임적(任勣)을 기념하기 위해 세운 이요당(二樂堂)이란 ‘ㄱ’자형 정자 건물이 있다. 연꽃이 필 때 이요당에 앉아 못둑에 피는 배롱나무 꽃과 소나무가 어유러진 풍경을 감상하기에 멋진 곳이다. 산벗은 ‘늘人’ 에 앉아 감나무 가지에 앉아 지저귀는 직박구리들을 바라보면서, 커피와 빵 한 조각을 먹고 나와 우산을 펼쳐 쓰고 지암골 입구로 향했다.
오전 10시 40분. 오늘 산행은 통일전 주차장에서 0.7Km 떨어진 동남산탐방지원센터를 출발해 이영재, 봉화대능선, 백운재, 고위봉, 열반재, 녹원정사에서 점심을 먹고 열반재, 고위봉, 백운재까지 되돌아와서 방향을 바꿔 신선암, 칠불암, 남산사, 카페 ‘늘人’으로 내려오는 코스다.
`늘人`을 나와 통일암을 지나 탐방지원센터 입구에 들어서니 국립공원해설사가 곧바로 가면 이영재, 우측으로는 국사곡 팔각정터, 금오봉으로 오르는 길이라고 친절하게 안내를 해준다. 일행은 탐방로 안내도를 휴대폰에 담는다. 숲길로 들어서니 비에 젖은 초록나무들이 유난히 맑고 깨끗하다.상큼한 나무들의 향기를 맡으며 임도를 따라 한참을 걸어가니 약수터가 나온다. 거북형상의 화강암에서 졸졸 흘러나오는 약수를 받아 마시고 힘을 내 계속 걸으니 고위봉 2.5Km라는 팻말이 눈에 띈다. 우거진 소나무 사이로 조금 걷다보니 봉화대능선과 이영재 입구로 갈라지는 길이 나온다. 봉화대능선(1.6Km)을 따라 좁은 산길을 부지런히 걷다보니 2주전까지 꽃길이었던 진달래는 순식간에 지고, 연분홍 수달래가 그 자리를 대신하고 있다.산벗 일행은 봄비를 맞으며 수달래와 솔향기를 맡는다. 시샘하듯 간간히 부는 비바람에 덧없이 진 진달래는 내년 봄이면 다시 볼 수 있을 것이다. 봄비 아래 나뒹구는 꽃잎들은 지나가는 시간이 남기고 간 흔적들이다. 꽃이 떨어진 나무에는 파릇파릇한 별 모양의 잎사귀가 봄비를 머금고 반짝거린다. 운무가 뿌옇게 피어오르는 몽환의 솔숲과 수달래 밭에서 눈을 감고 두 팔을 벌리고 큰 호흡을 하면서 봄기운을 실컨 들이마신다. 숲의 기운을 마음껏 마시고 나서 인증샷을 남기고 다시 걸음을 옮긴다. 봉화대능선을 벗어나 전망이 탁 트인 우칠봉(칠불암 위 봉우리)에 앉아 물 한 모금과 과일 한 조각을 나눠 먹는다. 잠시 쉬면서 역사가 살아 숨쉬는 경주 들판을 내려다본다.
쉼을 뒤로하고 다시 백운재(0.6Km)로, 백운재에서 고위봉까지 가는 거리도 0.6Km다. 조금은 힘들게 고위봉에 오른 일행은 각자 우산을 들고 단체 인증샷을 남긴다. 가파른 비탈길과 바위 사이를 빠져나오고 데크계단을 지나 조심조심 내려와 열반재에 다다른다. 이어 천룡사 방향, 녹원정사(1.2Km)에 도착하니 젊은 사장 내외가 반갑게 맞는다. 시간을 보니 오후 1시 40분이다. 배낭을 풀고 등산화를 벗고 따뜻한 방에 들어서니 등과 엉덩이가 뜨뜻하다. 콩나물, 김장김치, 비지, 물김치, 콩, 고추장, 된장찌개 등 여러 가지 나물을 섞어 만든 녹원정사표 산채비빔밥과 부추전, 막걸리 한 잔이 오감과 온기를 느끼게 한다. 점심을 먹은 후 커피 한 잔을 하고 선후배는 사진을 주고받으며 대화를 하는 동안 나는 온돌방에 누워 잠시 눈을 붙인다.
점심을 먹는 동안 잠시 비가 그치더니, 3시께 자리에서 일어나 나서려고 하니 비가 많이 쏟아진다. 주인장과 감사의 인사를 나누고 부지런히 걸어 열반재를 지나고 고위봉에 올라 쏟아지는 빗속에서 다시 우산속 세 사람이 기념샷을 남긴다.
비가 많아지자 빠른 걸음으로 한달음에 백운재에 도착했다. 열반재에서 우칠봉에 도착하니 비가 그치면서 산 아래서 운무가 뿌옇게 피어 올라온다. 이윽고 산들은 모두 제 모습을 감추고 완전한 운무의 세상이다. 비바람에 따라 순간순간 다른 모습을 연출하는 산들을 보고 있으니 신선의 셰계가 따로 없다. 설악산, 지리산, 한라산의 운무도 보고 그 속에 풍덩 빠져 보았지만, 이같이 신비한 자연의 연출을 본 적이 있었던가 하는 생각이 든다. 시시각각 조화를 부리는 운무를 배경으로 몇 장의 인생샷을 남기는 행운을 누린다.화가인 후배는 겸재 정선이 남긴 그림 가운데 대표적인 진경산수화인 〈인왕제색도〉가 연상된다고 했다. 여름날 한차례 비가 지나간 뒤 안개가 피어오르는 인왕산의 인상적인 순간을 표현한 〈인왕제색도〉는 바위를 가득 표현하여 단순하면서도 대담하게 배치했다. 또한 안개 부분은 텅빈 여백으로 처리해 보는 사람의 눈에 뿌옇게 낀 안개로 보이도록 했다고 한다. 지금 내리는 봄비가 그치면 꽃은 지고, 신비로운 운무의 조화는 사라질 것이다. 그렇다고 너무 아쉬워 할 일은 아니다. 봄이 지나면 여름이라는 새로운 계절이 올 것이다. 나무의 새순들은 비를 맞고 쑥쑥 자라 마침내 신록의 계절로 옮겨 가듯이, 우리에겐 남은 인생을 살아야 한다. 봄날이 끝나도 우리의 삶은 계속되고 각자는 자신에게 주어진 삶을 살아갈 수밖에 없다.
신선대를 지나 칠불암 돌계단에서 바라본 암자의 장독대를 보니 왠지 정겹게 느껴진다. 대안당에서 잠시 쉬면서 약수 한 잔으로 갈증을 달랜다. 칠불암은 동남산 봉화골의 가장 높은 곳에 있다. 남산불교 유적 중에 가장 규모가 크고 솜씨가 뛰어난 곳으로 통일신라시대 때 만들어진 마애삼존불과 사방불상이 있어 ‘일곱 부처님이 계신 암자’(칠불암)라고 한다. 칠불암의 삼존불과 사방불은 남산의 산세와 어울어져 보는 사람들의 감탄을 자아내게 한다. 약수로 목마름을 해결하고 솔숲길을 따라 쉬지않고 내려와 주차장에 도착하니 오후 5시다. 하산길은 확실히 가볍다. 즐겁게 산에 올라서 얻은 여유다. 차를 몰아 포항에 도착해 따뜻한 온천에 몸을 담그고 피로를 풀고 나와 간단한 식사로 우중(雨中)의 산행을 마무리한다. 귀가하는 동안 머릿속에는 산행을 했다는 생각보다는 종일 꿈속을 거닐었다는 아련함만 남는다. 6시간이 넘는 시간 동안 우리는 비내리는 남산에서 말로 표현할 수 없는, 남산이 숨겨놓았던 황홀한 비경들을 보고 느꼈다. 감히 축복의 시간들이었고 말하고 싶다. 수시로 산을 찾지만 어느 산이든 산은 누구도 차별하지 않고 모두를 안아준다. 오늘도 우산을 받쳐들고 좋아하는 선후배와 함께 남산을 거닐면서 산의 그 넉넉함과 관용을 배운 하루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