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러나 조광조의 이러한 도학정치 사상은 후일 퇴계 이황 및 율곡 이이라는 거목을 통해 조선의 정신세계를 구축하였으니, 선조 대부터는 사림이 정계를 장악하여 조선왕조를 떠받치는 구심점이 되었다. 하지만 정권을 잡은 사림도 시간의 흐름에 따라 동서와 남북으로 분당되고 성리학을 유일한 정치이념으로 하는 폐쇄적인 정치체제를 고수함으로써 사상적으로는 다양성과 유연성을 잃어갔고 대외정책에 있어서는 쇄국정책을 고집하였다. 이러한 국가시책으로 인하여 조선 후기까지도 대외적으로는 이방인의 출입을 엄금하여 서구의 상업자본 세력과의 접선이 차단됨으로써 서구문명을 받아들일 기회를 놓치는 결과를 가져왔다. 이러한 조선의 경우와는 달리 동양에서 가장 먼저 서구의 근대 과학문명을 받아들인 일본은 서세동점의 시대적 변화에 발 빠르게 대처하였다. 그 후 일본은 서구세력이 그들에게 적용한 제국주의의 전철을 답습하며 마침내 20세기에 들어와서는 조선의 침탈에 나섰고 성리학적 유교관을 고집하던 조선은 일본에게 국권을 빼앗기는 수난을 겪게 되었다. 이제 다시 조선과 인연을 맺은 네덜란드인들에 대한 이야기로 돌아가서 조선에 표착하여 조선에서 평생을 보낸 네덜란드인 벨테브레(박연)와 13년간의 억류생활 끝에 탈출하여 본국으로 돌아간 하멜에 대하여 알아보기로 하자. 그 내용은 그들이 조선에 남긴 것은 무엇이며, 또 그들이 서구에는 어떤 영향을 미쳤는지, 그리고 400년 전에 그들의 눈에 비친 조선의 모습은 어떠한 것인지를 확인하는 것이다. 먼저 15세기 말에서 17세기에 걸친 유럽인들의 동방진출의 상황을 개괄적으로 살펴본 다음 벨테브레와 하멜의 이야기로 넘어가기로 한다. 15세기 말 ‘지리상의 발견’에 이어 흔히 말하는 ‘대항해시대’가 열리면서 유럽인들은 동방 진출을 시도하였다. 이때 가장 선두에 나선 나라는 이베리아 반도에 있는 포르투갈과 스페인이었는데, 16세기 초엽에 포르투갈이 말레이 반도의 몰래카를 점령하고 16세기 중엽에는 중국의 마카오에 식민지를 건설하였다. 스페인은 1519년에 마젤란이 필리핀을 발견한 이래 이곳에 식민지를 건설하고 동남아시아, 중국, 일본을 무역의 기지로 삼았다. 이 후 두 나라를 제치고 네덜란드가 제해권을 장악하면서 동방무역권을 주도적으로 행사하게 되었다. 네덜란드가 진출하기 전까지는 이 두 나라가 제해권을 장악하였으나 17세기에 들어와 네덜란드가 인도네시아 자바섬 바타비아를 개척하여 동인도회사를 운영하면서 제해권은 네덜란드로 넘어갔다. 아시아 지역의 무역권을 장악한 네덜란드는 아시아 각국과의 무역을 위한 교역중심지로 1602년에 바타비아에 동인도회사를 설립하였고 인근의 타이완, 일본으로 무역권을 확장하여 활동하기 시작하였다. 따라서 이때부터 조선 주변을 항해하는 서양인은 네덜란드가 다수를 차지하게 되었다. 네덜란드인들보다 앞서 조선에 표착한 서양인으로는 포르투갈인으로 추정되는 마리이(馬里伊)가 있었다. 그는 1582년에 제주도에 표착하였고 한양에 압송되었다가 곧 명나라로 이송되었다. 그 후 1604년에는 스페인 출신 후안 멘데스가 난파되어 조선 수군에 체포되었다가 이 후 명나라에 송환된 적이 있었다. 멘데스 이후에 조선에 표착한 서양인이 네덜란드 출신 벨테브레(박연)였다. 벨테브레는 일본 나가사키를 향해 항해하던 중 조선에 표류하여 연안에 식수와 양식을 구하러 상륙하였다가 체포되었다. 그는 경주부에서 동래의 왜관으로 보내졌다가 다시 한양으로 압송되어 결국 조선에 귀화하여 훈련도감의 교관으로서 조선 사람과 결혼하여 정착하였다. 벨테브레가 조선에 귀화하여 정착한 것은 조선이 그를 필요로 하였기 때문이라 할 수 있다. 북벌정책을 표방하던 효종은 당시로서는 강력한 무기인 명나라에서 들여온 홍이포의 사용과 개발에 벨테브레가 유용한 인물로 생각되었던 것이다. 벨테브레가 조선에 표착하기 전의 조선에 대한 인식은 지금으로서는 상상할 수 없을 만큼 은둔의 나라였음을 알 수 있다. 효종의 부마로서 대체로 벨테브레의 사정을 잘 알 수 있었던 정재륜(1648〜1723)이 남긴 한거만록(閑居漫錄)에는 벨테브레의 조선 표착 당시의 상황을 다음과 같이 적고 있다. 박연은 남만국(南蠻國) 사람이다. 숭정 무진년에 우리나라에 표도하였다. … … 또 말하기를 “본국에 있을 때 고려인(여기서는 조선을 말함)은 인육(人肉)을 구워 먹는다고 들었다. 그들이 표도하였을 때는 해질 무렵이었는데, 군졸들이 횃불을 높이 들고 와서 살피자, 배에 탄 사람들이 이 불은 우리를 구워 먹기 위해 지핀 것이라고 말하며 울었으니, 곡성이 하늘에 닿을 정도로 컸다. 얼마 후에 비로소 그것이 잘못된 생각임을 깨달았는데, 대개 남만의 풍속에서는 밤에 다닐 때는 모두 등불을 들고 다니지 횃불을 들지 않았기 때문이다.”라고 하였다. 위의 기록을 통해 처음으로 조선 땅에 표착했던 벨테브레 일행의 조선에 대한 인식을 알 수 있다. 그들은 조선을 식인국으로 알고 있었던 듯하다. 조선 연안에 내렸을 때, 조선인들이 나무에 불을 붙혀 들고 다니는 것에 심한 공포감을 느꼈다. 조선에 대하여 잘못된 인식을 가지고 있었던 그들은 조선 사람들이 횃불로 그들을 구워먹을 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통곡을 하며 절망하였던 것 같다. 일본이나 중국에 비하여 그만큼 조선은 서양인들에게 알려져 있지 않았고 조선은 서양 세계로부터 고립되어 있었음을 여실히 알 수 있다. 1627년 벨테브레가 조선에 표착하였을 무렵 조선의 사정은 신식 무기를 다룰 줄 아는 서양인을 필요로 하고 있었다. 명나라가 국운이 기울고 신흥 강국인 여진족이 청(淸)으로 국호를 정하고 중원을 넘나보는 시기였으며 조선 또한 청나라의 눈치를 보는 상황이 전개되고 있었다. 전왕인 광해군이 명과 청 사이에서 중립적인 자세로 외교를 벌이며 국정을 운영한데 비해, 인조 정권은 명에 대한 사대를 정치 이념으로 하면서 명에 대한 재조지은을 잊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었다. 그것은 곧 명나라를 위해 청나라를 공격하려는 것이었다. 이것이 당시 조선 조정의 대외정책의 주류였다. 즉 조선은 국제정세와는 거리가 먼 방향을 향하고 있었던 것이다. 
주메뉴 바로가기 본문 바로가기
▲ 제보하기
[메일] jebo@ksmnews.co.kr
[카카오톡] 경상매일신문 채널 검색, 채널 추가
유튜브에서 경상매일방송 채널을 구독해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