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들은 400년 전 쯤 조선이라는 나라의 지배체제는 어떠했으며 백성들의 삶은 어떠했을까에 대하여 궁금해진다. 오늘날은 서구인의 관점에서 세계를 바라보는 시각이 보편화 되었지만 약 400년 전만해도 세계는 유럽 등 서양과 중국 등 동양으로 양분되어 세계질서가 움직이는 시대였다. 이때 동양에서는 중국을 중심으로 폐쇄된 교역체제를 유지하고 있었던 데 반해 서양은 해양세력들이 점차 동양으로 무역로를 개척하며 그 세력을 넓혀오고 있었다. 서양에서는 상업자본시대로서 해외 무역의 확장이 주요 이슈가 되었다. 특히 네덜란드는 일본을 거점으로 동양진출을 꾀하였으니 이에 일본은 나가사키에다 서양과 교류할 수 있는 유일한 대외창구로서 인공섬 데지마(出島, Degimamachi)를 만들어 네덜란드로부터 조총 등 무기와 각종 서양 물품을 들여오고 있었다. 그러나 동양 전체로 보면, 명, 청나라를 중심으로 한 조공무역체제가 존속되고 있었다. 다만 일본과 여진 등이 강력히 무역의 필요성을 제기하며 중국에 무역을 폭넓게 개방을 할 것을 요구했다가 중국이나 조선이 해금정책을 고수하자 이에 왜구들은 조선과 명의 해안 지역을 위주로 약탈 등의 방법으로 강제적 무역행위를 시도하기도 하였다. 이 후 일본의 전국시대를 종식하고 통일을 이룬 도요토미 히데요시 집권기에는 아예 중국을 정복하여 중국의 은을 모두 빼앗기로 작정을 하고 조선을 앞세워 명나라를 공격하겠다(征明嚮導)고 공표하기에 이르렀다. 이것은 한편으로는 도요토미에게 복속한 각 영주들의 힘을 빼는 동시에 협조한 댓가를 제공함으로써 그동안 쌓였던 그들의 불만을 잠재우는 수단이 되기도 하였다. 그 결과 벌어진 동양 삼국의 전쟁이 바로 1592년에 발발한 임진왜란이었다.
도요토미의 죽음과 함께 7년 전쟁이 끝나고 이어서 정권을 장악한 도쿠가와 이에야스(德川家康) 막부는 포르투갈, 스페인 등 서구세력에 무역창구를 개방하고 대유럽 무역을 시도하였다. 그러나 서양인들이 점차 기독교를 전파하여 일본 국민들의 신앙세계를 침투해오자 백성들의 통제에 곤란을 느낀 도쿠가와 막부는 서양인들의 기독교 선교를 엄금하였으며 무역 또한 제한하였다. 그 결과 네덜란드에 한하여 나가사키만의 데지마에 네덜란드 상관(무역관)을 개설하게 하고 무역을 허용하였다. 따라서 오직 네덜란드만이 대일본 무역을 독점하게 되었고 이에 네덜란드 상인들은 일본의 나가사키로 정기적인 무역선을 보내어 상거래를 하였다. 일본은 서구의 앞선 문명을 발아들일 필요를 느꼈고 네덜란드를 통해 서구에 대한 구체적인 연구를 하기 시작했다. 이것이 소위 말하는 난학(蘭學)이었다. 이 무렵 일본을 향해 항해하던 중 풍랑으로 조선에 표착한 네덜란드인들이 벨테브레와 하멜이었다. 일본과 달리 이 시기 조선은 쇄국정책을 취하고 있었기 때문에 서양인들과의 무역을 일체 허용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만남 자체도 금지하고 있었다. 여기서 먼저 쇄국정치의 배경이 된 조선 중기까지의 조선의 정치상황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 14세기 말에 개국한 조선은 왕권과 신권의 조화를 정치적 이상으로 삼았다. 초기에는 개국공신을 비롯한 훈구세력이 득세하여 상대적으로 신권이 우세한 측면이 없지 않았다. 이에 국왕들은 이들을 견제하는 세력을 키워 왕권을 강화하고자 하였다. 조선 전기에 있어서 왕권의 정점에 이른 시기는 연산군 시대였다. 그러나 이미 성종 대부터 훈구세력과 맞선 지방의 사림 세력들이 서서히 중앙정계에 진입하여 그들의 뜻을 펼치면서 성리학을 이념으로 삼고 정치, 경제, 사회, 문화 등 사회전반을 통제하는 도학의 시대를 열고자 하였다. 이러한 사림들의 출발점은 개국 초에는 이성계의 역성혁명에 반대하던 세력이 지방으로 낙향하여 후학들을 가르치던 그룹이었고, 이 후 세조의 정권 탈취에 반대한 세력들 또한 낙향하여 은둔하며 지방 세력을 길렀으니 이 두 세력 집단을 통틀어 흔히 사림(士林)이라 부른다. 이들은 성종 조부터는 중앙정계로 나아가 청요직을 맡으며 언론을 장악하였고 중종조에는 조광조가 성리학을 조선의 유일한 정치 및 도덕의 이념으로 삼을 것을 주장하며 기존의 훈구 보수 세력들을 몰아내고 혁신적인 정치풍토를 조성하고자 개혁을 시도하였다. 즉 덕을 쌓은 훌륭한 군주가 백성들을 위한 깨끗한 정치를 해야 한다는 것으로서 소위 말하는 도학정치를 실현하고자 한 것이다. 그러나 조광조의 개혁은 지나치게 급진적이어서 왕과 훈구세력들이 모두 힘겨워 한 나머지 양쪽으로부터 공격을 받게 되었고 개혁은 실패로 끝나고 말았다. 개혁의 내용 중 보수 훈신들의 반발을 가장 크게 불러온 것이 위훈삭제(가짜 공신의 제거)의 시도였다. 어느 시대나 기득권자들의 부당한 이익을 박탈하는 일은 정의라는 명분만으로는 결코 성공하기가 쉽지 않았던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