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북도는 ‘퇴계선생 마지막 귀향길 재현행사’의 마지막 구간, 삽골재에서 도산서원 걷기 여정을 마무리하고 지난 9일 폐막식을 가졌다.퇴계선생 마지막 귀향길 재현행사는 45명으로 구성된 재현단이 퇴계선생의 발자취를 따라 서울 경복궁을 출발해 안동 도산서원까지 5개 시도, 17개 시군구를 거쳐 걸어오며 퇴계선생의 참뜻을 되새기는 뜻깊은 시간이 되었다. 구간별 주요 일정으로는 △2일차 봉은사에서 원명스님(주지스님)의 차담회와 `퇴계가 도산으로 간 까닭`을 주제로 배병삼(영산대학교) 교수의 강연 △4일차 김동연 경기도지사와 남양주시 구간 걷기 △8일차 충청감영(충주관아공원)에서 시 창수(퇴계와 송당의 증별 시)와 해설 강의 △9일차 청풍관아(청풍문화재단지) 한벽루에서 시 창수(퇴계와 서애의 한벽루 시)와 해설 강의 △12일차 영주 이산서원에서 `영주와 퇴계선생`, `이산서원과 퇴계문인들` 강연 △14일차 마지막 날에는 도산서원에서 고유제와 폐막식을 개최하고, 13박 14일간 대장정의 막을 내렸다.폐막식에는 귀향길 재현을 경험한 재현단을 대상으로 소감문을 평가해 대상 1명(도지사상), 금상 2명(안동시장상), 은상과 동상 7명(도산서원장상)을 시상하고 270㎞를 끝까지 걸어온 참여자에게는 안동지역 관광 숙박권을 제공했다. 도에서 이 행사에 특별한 의미를 부여하는 이유는 지방시대의 성공모델을 퇴계정신에서 찾을 수 있기 때문이다. 당시 퇴계선생의 귀향은 16세기 서원운동으로 발전했고, 이는 국가의 자원과 인재를 지방으로 되돌려 놓고 지방시대 혁명으로 이끈 계기를 마련한 것이었다.지금 경북도는 대한민국 어디서나 살기 좋은 지방시대, 서울 쏠림과 지방소멸의 악순환을 끊어내려는 노력으로 지역혁신중심 대학지원체계(RISE) 시범 선정, 지역산업기반 인재양성체계를 구축하는 등 수도권 집중 해소를 위한 지역교육혁명과일자리 혁명을 주도하고 있다. 또한 지역 특화형 비자와 광역 비자 제도를 통한 지방주도형 외국인 정책, 사회통합을 통한 외국인 공동체 구현 등 지방시대 대전환 정책을 누구보다 앞장서 추진하고 있다.퇴계선생이 살다간 16세기는 조선 지성사(知性史)에서 볼 때, 사림(士林)의 성장기라 할 수 있다. 선비는 성리학을 전공하고, 자신의 이념을 실천하며, 사림이란 용어의 복수 개념이다. 그러므로 선비는 수기치인(修己治人)하는 학자로서, 자신의 인격과 학문을 닦아 벼슬에 나아가서 남을 다스리는 것을 정도(正道)로 삼았다. 성장기를 무난히 지내면서 공부에 전념하다가, 서른네 살에 대과에 급제하여 비교적 벼슬길은 순조로웠다. 1543년 마흔세 살 때에는 성균관 대사성직을 사퇴함으로써 새로운 날을 맞이한다. 그 후부터는 벼슬을 거절하는 사직(辭職)의 연속이었다. 이때부터 왕위의 교체(仁宗과 明宗의 승계)로 인한 권력다툼 현상이 일어나, 당시 상황이 선생의 이상과는 부합되지 않음을 깨달았다.
꼿꼿한 선비정신으로 살아온 선생은 그러한 상황 속에서 벼슬에 안주하여 사대부로 자임하기가 어려웠을 것이다. 그러므로 그것을 뿌리치는 길은 사직뿐이었다. 오직 이 길만이 구 정치 세력이 극성하던 시대적 한계를 극복하는 대안이었다. 명종(明宗) 때에 물러나기를 거듭하면서 오히려 명망을 얻은 선생은 쉰 살부터 일흔 살까지 강학기간 동안 탁월한 학문적 성취와 제자 양성이라는 두 가지 업적을 이루었다.1567년 선조(宣祖)가 즉위하자 사부(師傅, 왕의 스승) 대접을 받고 선생의 제자들이 대거 조정에 등용됨으로써 사림정치의 기반을 다졌다. 선생은 16세기 조선왕조 시대의 사회상이 인간적인 성리학에서 벗어난, 여러 가지 문제점을 해결할 수 있는 양심에 근거한, 사림을 양성하려는 의미에 자신을 비롯한 제자들에게 선비정신과 인본주의(人本主義)에 바탕을 둔 진정한 교육을 갈망한 치세적 학자였다. 학문에 전념하면서 제자를 양성한 학불염(學不厭) 교불권(敎不倦)의 이상(理想)은 일찍이 인(仁)을 주장한 공자사상에서 비롯되었다. 공자는 철환천하(轍環天下) 이후 자신이 주창한 왕도(王道)의 실현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깨닫고는 고국으로 돌아와 3천 제자를 양성하고 “학문함에는 싫지 아니하고 가르침에는 게으르지 않다”고 하였는데 이러한 공자 사상에 근거한 처사임에 틀림이 없다.이황은 불혹(不惑)의 고개를 넘으면서, 토계(兎溪)에 은퇴해 살겠다고 다짐하였던 것이다. 70세에 이르기까지 임금의 부름에 벼슬을 사양한 것이 무려 20여 차례, 하지만 그것도 마음대로 되지 않았다. 도산(陶山) 일대의 수려(秀麗)한 풍광만큼이나 퇴계의 삶도 맑고 그윽했다. 선생이 기거한 도산서원은 이러한 선비정신의 도량이었고 학문의 전당이었다. 34세에 관직에 나아가 50세까지 있으면서, 무언가를 느꼈을 것이다. 마흔세 살 때 첫 번째 사직서를 제출하였지만 곧 소환되었다.그런 이후 계속 사직서를 내고 은퇴하려 했지만, 그때마다 조정의 소환이 뒤따랐다. 마흔여섯 되던 해도 두 번째 사직했으나 재소환 되기는 마찬가지였다. 선생은 어떻게 한양을 벗어날까 궁리 끝에 단양군수와 풍기군수를 자청했다. 단양군수 시절에는 ‘매향’이와의 로맨틱한 사연이 있었고, 풍기에서는 소수서원(紹修書院)을 관리하면서 청원하여 사액(賜額)을 받기도 하였으며, 몰려드는 제자들을 가르치기 시작하였다. 신분이 비천한 사람이 공부를 배우러 왔음에도 그를 물리치지 않았으니, 그 후에 그를 칭송하기도 하였다.신병을 이유로 세 차례의 사직서를 제출하고, 회답도 기다리지 않고 짐을 꾸려 고향으로 돌아가 버렸다. 근무지 이탈 죄를 범한 것이 화근이 되어 조정에서는 곧바로 그의 임명장(職牒)을 박탈해 버렸다. 당시 선생의 나이 50세였다.관직에 머무는 동안은 어떻게 관직에서 벗어나 야인(野人)으로 돌아갈 수 있을까를 근심했던 시련기였다. 그러나 2년 후 조정에서는 ‘홍문관 교리’라는 벼슬을 임명해 다시 불러들였다. 임금의 명(命)을 거역하면 죄인이 되기에 조정으로 나아갔다. 선생은 1년을 채 넘기기도 전에 성균관 대사성을 버리고 다시 초야로 떠났으니, 52세 이후 세상을 떠날 때까지 20여 년을 임명, 사퇴, 임명, 사퇴, 해직청원, 임명, 취임지부 등을 거듭하였다.그후 벼슬의 임명과 사퇴를 반복하였음도 실제로는 형식에 불과하였다. 선생은 임명과 사퇴를 반복하면서 죽는 날까지 벼슬을 멀리하였다.당시 부패와 타락으로 대의(大義)정치가 몰락해 가고 있는 현실을 학자의 양심으로는 차마 볼 수 없었을 것이다. 그 구렁텅이로 빠져 드느니 초야에서 학문에 전념하고 성리학적 깊은 사고에 의한 올바른 가치관으로 조선 후기의 사림에게 자양분을 배양하려 했던 것이다. 경북도민은 퇴계선생의 참다운 선비정신과 진정한 학자의 모습을 통해, 지방 인재 양성, 지역공동체 형성, 지방인구 유입 등 지방시대에 나아가야 할 방향을 제시한 퇴계선생의 가르침을 되새겨야 한다. 아울러 지방시대를 열어가는 제2의 퇴계혁명의 정신으로 계승·발전시켜 나아가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