곤자르로 떠나는 아침이 어수선하다. 비도 오락가락하고 어디서 나타났는지 갑자기 많은 순례자들이 무리지어 걷는다. 어린 학생들이 단체로 걷는 모습도 보인다. 문득 사리아에서 산티아고 대성당까지 100여 킬로미터만 걷는 단체 순례자들이 많다는 말이 떠오른다. 산티아고의 순례자 사무소에서 마지막 100여 킬로미터만 걸어도 완주 증을 주기 때문에 시간이 부족한 사람은 이런 방법을 쓴다고 한다. 나로서는 그렇게 해서 받는 완주증이 무슨 의미가 있는지 도저히 모르겠다. 하긴 의미라는 건 각자가 붙이기 나름이긴 하니까.오늘부터는 숙소예약도 미리미리 해야 한다. 서둘러 곤자르의 알베르게 예약을 시도한다. 이름, 침대 하나, 도착예정 시각을 대답해 주었는데도 문제의 네 번째 질문이 또 날아든다. 이 정체불명의 네 번째 질문 앞에서 나는 늘 꿀 먹은 벙어리가 될 수밖에 없다. 계속 우물쭈물하자 올라? 올라? 하더니 전화를 끊어버린다. 이름과 인원, 도착시각 외에 예약에 필수적인 정보가 도대체 뭘까? 묻지 않고 예약을 받아주는 숙소도 많았던 것을 보면 꼭 필요한 정보는 아닐 것 같기도 한데. 네 번 째 질문 대체 누구냐 너?하릴없이 내처 걷는다. 마침 바가 보인다. 두어 시간 전 바에서 베이컨 한 장을 끼워 넣은 바게트 빵 한 개와 바나나 하나를 오렌지 주스와 함께 먹었다. 허기는 느껴지지 않았지만 바 직원에게 예약대행을 부탁해 볼 요량으로 무작정 들어가서 ‘아쿠아리우스’ 한 캔을 주문한다. 직원들이 순례객들과 동네손님 대응에 분주하다. 기다렸다가 틈을 봐 부탁하자 한 여직원이 예약을 대신 해 준다. 통역자가 내게 물어보는 내용은 역시나 별 게 없다. 통상적인 내용뿐 생소한 질문은 없다. 정말 아직도 궁금하다. 네 번 째 질문 너 말이야!숙소예약까지 대행해 준 고마움의 표시로 여기서 점심을 먹고 가기로 한다. 이온음료와 함께 주문한 또르띠야의 두께와 크기가 이 집도 어마어마하다. 겨우 다 먹었다. 크기에 압도당해서 맛은 기억에도 없다. 오락가락 하던 비가 출발 무렵에는 작정이나 한 듯 쏟아지기 시작한다. 급히 판초우의를 둘러쓴다. 길은 그럭저럭 걸을 만하다. 비 맞은 초목들이 싱그럽다. 마르카도이로와 빌라차를 지나 멀리 초원 너머로 포르토마린이 보인다. 왼쪽 길과 오른쪽 길로 나뉜다. 조금 더 멀다고 하는 오른 쪽 길을 선택해 걷는다. 포르토마린을 눈앞에 두고 거대한 높이의 다리가 나타난다. 아래로는 풍부한 수량의 미뇨 강이 유현하게 흐르고 있다. 현대식 디자인의 다리 높이가 아찔하다. 꼭 나처럼 고소공포증이 없는 사람들도 부담스러워할 높이다. 시선이 아래쪽을 향할 때마다 현기증이 난다.다리가 끝나는 지점에서 포장도로를 건너 가파른 계단을 올라 아치형 문을 통과한다. 그때 어디선가 유창하고 친숙한 한국어가 들려온다. 십년지기가 부르는 듯 명확한 내 이름이었다. 깜짝 놀라 고개를 돌려보니 차미와 라지가 길가에 서서 웃으며 손을 흔든다. 여전히 함께 걷고 있는 것을 보니 둘의 케미가 좋은 모양이다. 반갑게 두 사람과 포옹을 나눈다. 간단한 대화를 나누고 헤어지자마자 다른 방향으로 접어들었다. 잠시 마을 골목길을 갈지자로 헤매다 곧 화살표를 찾아 까미노에 오른다.그동안 오락가락하던 비가 포르트마린에서 목적지인 곤자르까지 가는 8킬로미터에는 내리지 않고 비교적 맑아서 젖은 옷도 거의 다 말랐다.곤자르 초입쯤이었을까. 아니면 그 전 어디쯤이었을까. 몇 안 되는 인가가 있는 고샅길을 걷는 중 생게망게하게 코에 익은 된장찌개 냄새가 훅 덮쳐온다. 다시 잡아보려 가만히 ‘코를 기울여’ 보았으나 다시는 포착되지 않는다. 아무리 K푸드가 ‘대세’라지만 아무려면 스페인 시골마을에서 된장찌개를 끓여 먹는 에스파뇰이 있으려고. 일종의 환취였다. 특별히 된장찌개가 간절한 것도 아닌데도 일어난 이런 현상이 조금은 당혹스럽다. 프루스트 현상은 환취를 통해서도 일어났다. 한들한들 코스모스가 주변을 온통 환하게 밝혀 주었을 때 뚝배기 안에서 보글보글 끓던 된장찌개는 지미(至味) 중의 지미이자 ‘궁극의 맛’이었다. 하지만 그것은 방금 지나가 버린 환취처럼 다시는 접할 수 없으리라는 것을 이미 나는 알고 있다. 비 때문인지, 이미 진부해지기 시작했지만 까미노가 얼마 남지 않았기 때문인지, 내일이면 들이닥칠 60번째 생일 때문인지 까닭 모르게 살짝 우울해진 기분에 된장찌개 환취까지 껴든다. 그래도 순례자는 길을 가야 한다. 나그네는 걸음을 멈추어서는 안 된다. 곤자르까지 길은 꽤 괜찮았다. 초원과 들판과 숲이 번갈아 나타나 주었고, 숲도 다양한 형태로 모습을 바꾸어 가며 나타나 주었다. 카사 가르시아 알베르게가 마을 깊숙한 곳에서 기다리고 있다. 문이 닫겼다. 뒤로 돌아가 보니 또 다른 문이 있다. 앞뒤의 목재 문들이 한옥 풍이다.5시, 체크인을 할 때 리셉션에서 저녁을 먹을 거냐고 묻는다. 그렇다고 하니 6시 30분부터라고 알려준다. 숙소에서 제법 떨어진 야외 잔디밭 한 쪽의 세탁실로 간다. 빨래를 널 때는 화창하던 하늘이 갑자기 소나기를 쏟아내다가 다시 개기를 반복한다. 잔디밭 빨랫줄에서 빨래를 걷어 세탁실 처마 밑에 다른 순례자들 빨래와 함께 널어놓는다. 옹색하고 궁상맞아도 어쩔 수 없다. 오늘은 간만에 ‘주문빨’이 좋다. 음식을 받고 보니 ‘순례자 메뉴’다. 싱싱하고 푸짐한 샐러드와 크고 작은 두 대의 돼지갈비가 입을 떡 벌어지게 한다. 옆 테이블의 남녀커플 순례자도 함께 놀라 소리까지 지른다. 작은 건 부드러운 반면 큰 것은 조금 질기긴 하다. 그래도 프랑스에서 먹던 덤프트럭 타이어 조각 같았던 갈비에 비하면 순두부급이다. 양이 많아 다 먹지 못 하고 남겼다. 디저트로 나온 두 조각의 아이스크림도 훌륭하다. 더 훌륭한 건 가격이다. 이름 모를 붉은 음료까지 해서 12유로. 아까부터 대문 쪽 야외 테이블에 단체손님들이 앉아 식사 후 술을 마시며 담소를 하고 있다. 오락가락하는 비 때문에 조심히 세탁실을 몇 번 다녀오는데 그때마다 자신들이 통행에 지장을 주면서 외려 나를 슬쩍슬쩍 흘겨본다.대문을 나서다가 상의 주머니에 넣어두었던 휴대전화기를 떨어뜨렸다. 시멘트 바닥에 전면을 부딪힌 전화기 액정이 거미줄을 치듯 깨어졌다. 전화기 작동이 안 되면 모든 여행에 막대한 지장을 준다. 다행히 셀카를 찍을 때 흐릿한 점 외에는 다른 작동에 이상이 없다. 아찔한 순간이었다. 이튿날이 밝았다. 예순 번째 생일 아침이다. 특별한 감흥 없이 7시 40분에 멜리데를 향해 출발한다. 오늘은 15개의 마을을 거쳐 간다. 마을 간 거리가 가까운 곳은 500미터, 멀어야 4킬로미터다. 11시 조금 넘었을 무렵이니까 팔라스 데 레이로 가는 중이었을까. 여든 살 가량의 할머니가 휠체어를 타고 앉아 길 저쪽을 바라보는 뒷모습이 보인다.(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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