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년은 그것 보란 듯 반색하고 어머니는 한 시름 내려놓을 수 있겠다는 반응을 보여 다행이었다. 그래도 어머니의 생각은 다시 원래 자리로 되돌아갈 가능성이 높다. ‘기성복’이란 이미 다 만들어진 옷이란 뜻이고, ‘기성세대’란 자기 틀이 완고하게 갖춰진 세대라는 뜻이다. 나이든 사람들의 생각이 잘 바뀌지 않는 이유다. 아마 이 모자는 내일도 여전히 이 문제로 설왕설래하게 될 것이다. 어쩌면 모자는 순례길에서 이 문제의 접점을 찾고자 했을지 모른다. 같은 방향으로 걸으면서 주고받는 대화는 최고의 소통을 담보한다. 석가도, 예수도, 소크라테스도, 공자도 함께 걸으면서 제자들과 대화를 통한 소통을 추구했다. 가까워지고 싶은 사람이 있거든 같은 방향으로 나란히 걸어라. 그러면 어느 순간 두 사람은 놀라울 정도로 친근한 관계가 되어 있을 것이다.그러나 이것은 어디까지나 쌍방이 소통의 의지를 어느 정도 가졌을 때 이야기일 뿐 그렇지 않은 경우엔 큰 효과를 기대하기 어렵다. 모나드에는 창이 없기 때문이다.이튿날 아침 알베르게를 나와 또 다시 길어구를 찾지 못하고 한동안 헤맸다. 어제 청년의 얘기로는 자연경관이 좋은 길과 평범한 길이 있으며, 전자는 거리가 멀고, 후자는 거리가 짧다고 했는데 어느 길이 좋은 길인지 을개살개하기만 하다.
그냥 마음이 가는 쪽으로 몸을 밀어 넣는다. 갈리시아 주 아니랄까봐 역시 아침부터 안개가 자우룩하다. 기온도 낮고 구름도 많고 자연도 좋다. 숲길은 어제도 오늘도 이국적이지는 않다. 기왕이면 이국적인 정취를 느끼며 걷고 싶지만 원시림을 지나는 이런 길도 나쁘지 않다. 출발 직후에 잠깐 아스팔트길을 걸은 이후부터는 사리아까지 비슷한 분위기의 숲길이 이어졌다. 왼발의 종자골과 아치 부분의 통증 외에는 어려움이 없어 편안하게 걷다보니 생각보다 이른 시각에 사리아에 도착했다. 트리아카스텔라에서 25킬로미터 지점인데 7시 20분에 출발하여 11시 30분경에 사리아에 진입했다. 출발 때 찍은 사진과 사리아 진입 직후 찍은 사진의 시각을 보면 틀림없지만 3시간여 만에 25킬로를 걸었다는 건 말이 되지 않는다. 그날의 메모에도 ‘아무리 생각해도 15킬로미터 정도 밖에 걷지 않은 기분’이라고 적혀 있다. 아무래도 전날 청년이 말한 두 갈래 길 중 거리가 짧은 길로 접어들었던 모양이다. 거리가 먼 대신 아름다운 풍경이 펼쳐진 그 길은 ‘가지 않은 길’로 가슴 속에 남겨 두기로 한다. 오는 길의 자연이 나쁘지 않았다는 점에서 보면 어쩌면 청년이 짧고 아름다운 길과, 길고 평범한 길을 반대로 알고 말해 주었을 가능성도 있겠다. 뭐 어쨌든.사리아로 막 진입했을 무렵 저 앞에 남녀가 나란히 걷는 모습이 아무래도 한국인 같다. 복장이나 분위기를 보면 한국인임을 어렵잖게 판별해 낼 수 있다. 거리를 좁혀 점점 다가가니 두 사람의 목소리가 바람을 타고 들려온다. 혹시 어제 그 모자인가, 하며 다가가는 찰나 아들의 목소리가 들린다. 분위기가 심상찮다. 맙소사! 이들은 아직도 접점을 찾지 못하고 있다. 까미노는 이제 막바지로 접어들건만 아직도 안타까운 공회전이라니.이럴 때 누가 나타나면 서로가 곤란해진다. 속도를 늦춰 거리를 유지하려는 순간 어머니가 뒤를 돌아보고 나를 발견하고 만다. 어색한 짧은 인사만 나누고 먼저 앞질러 갔다. 공연히 뒷통수가 뜨겁다. 하필이면 그럴 때 나타난 죗값이다.
예상보다 일찍 도착한 사리아에서 묵고 가기엔 너무 싱겁다. 발은 불편해도 몸은 가벼우니 복잡한 사리아를 지나 바르바델로의 두 번째 마을 오 모스테이로로 가기로 한다. 아직 12시도 채 되지 않은 시각이라 5킬로미터를 더 가도 1시쯤이면 도착가능하다. 사리아를 빠져나가 다시 숲길로 접어든다. 아까 지나온 숲길과 거의 비슷한 분위기다.온전치 못한 발 탓에 추가로 걷는 5킬로미터가 생각보다 힘이 든다. 오 모스테이로에 도착했으나 알베르게는 마을에서 한참 떨어진 곳에 나 홀로 있다. 알베르게가 시야에 들어옴과 거의 동시에 후두둑, 굵은 빗방울이 떨어지기 시작한다. 다행이다. 잔디밭이라 할까, 들판이라 할까. 넓은 공간을 앞에 두고 덩그러니 선 알베르게 앞에 세 명의 순례자가 앉아 있다. 혹시 문 닫은 알베르게인가? 다행히 아직 체크인이 시작되지 않았을 뿐이었다. 입구에서 안을 들여다보니 여성 직원이 분주히 쓰레기봉투를 들고 오가며 1분만 기다려 달란다. 10분이 넘어서야 문을 열어준다.제법 큰 공간에 베드도 많은데 유럽 청년과 스페인 중년남자, 나 셋뿐이다. 그나저나 귀국비행기표를 지금 예약해야 하나 말아야 하나 고민이다. 코로나19가 다소 진정국면으로 접어들자 팬데믹에 지친 사람들이 해외로 쏟아지기 시작하면서 항공료가 급등하는 현상이 발생했다는 소식 탓에 은근히 걱정이 된다. 순례를 끝내고 그리스로 넘어가는 항공표는 국내에서 예약했으나 귀국일은 특정하지 않고 탄력적으로 결정하기로 한 터라 고민이다. 예정대로 약 2개월 후에 귀국하더라도 지금쯤 예약을 해 둬야 든든한데 그러자니 몇 배로 폭등했다는 항공료가 걱정이다.지금 구입을 해야 할지 조금 더 지켜보고 구입해야 할지 갈등이 어제부터 심각한 수준까지 이르고 있다. 일단 인터넷으로 항공편 사정을 구체적으로 확인해 보아야겠다. 그런데 아무리해도 와이파이 연결이 안 된다.리셉션으로 가 직원에게 연결을 부탁한다. 여직원이 전화기를 한참 주물러도 도통 연결을 시키지 못 한다. 하다하다 내 영문 이름자까지 물어본다. 몇 번을 반복해도 안 된다. 지칠대로 지친 내가 전화기를 받아 돌아서자 직원이 등뒤에서 ‘쏘리’를 연발한다. 20, 30분쯤 후 내 베드로 온 그녀가 다시 해보게 전화기를 달란다. 여전히 버벅댄다. 급기야 전화번호와 생년월일까지 묻는다. 또 몇 번을 반복해도 안 된다. 기가 찬다. 이쯤 되니 혹시 전화기로 무슨 장난을 치려는 걸까 하는 의심마저 든다. 참다 참다 내가 버럭하며 전화기를 빼앗다시피 돌려받자 두 눈을 동그랗게 뜬다. 놀람과 미안함이 동시에 담겨있다. 검은 마스크 위 두 눈동자가 한없이 측은해 보인다. 금방이라도 눈물을 떨굴 것 같다. 애써 그 눈을 피한다. 나의 냉갈령에 그녀가 맥없이 돌아선다. 식당에 밥 먹으러 가면서 리셉션에 들러 미안하다고 사과를 주고받았는데도 마음이 무겁다. 측은한 두 눈이 떠올라 마음이 짠하다. 그깟 와이파이가 뭐라고, 오늘 당장 항공권을 구하지 않으면 귀국이 불가능한 것도 아닌 것을. 설마하니 자신이 근무하는 알베르게 투숙객의 전화기로 나쁜 장난을 하려 했을까.3시쯤 아까 지나온 길을 한참 되돌아가 식당을 찾아 들어간다. 무작정 생선과 쌀이 있는 음식을 달라고 주문한다. 검은 플라스틱 식판에 붉은 소스를 뒤집어 쓴 생선 튀김 하나와 주먹만 한 밥 한 덩이가 담겨 나온다. 딱 양심불량 초등학교 부실급식이다. 학부모들이 피켓 들고 항의할 수준이다. 다 먹어도 먹은 것 같지가 않다. 작은 생선 요리를 하나 추가한다. 그래도 마찬가지다. 아쉽지만 어쩔 수 없다. 결제를 한다. 한화 2만 6천원이란다. 헛웃음이 났다. 까미노에서 가장 허술하고 비싼 식사였다. 얼마나 부실했던지 6시쯤부터 허기가 밀려온다. 배낭에도 비상용 빵 한 조각 없다. 비도 오는 길을 걸어 다시 식당으로 갈까 말까 망설이다 어둑어둑해지는 밤 10시 가까워서야 결국 포기한다. 식당 문도 이미 닫았을 것이다.(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