트리아카스텔라로 출발하는 이튿날 아침이 꽤 쌀쌀하다. 배낭 어깨끈에 묶어 두었던 얇은 조끼를 풀어 입어도 소용없다. 얇은 반장갑을 낀 손이 시리다. 폴대를 옆구리에 끼고 입김을 호호 불며 시린 손을 달래 봐도 역시 별무소용이다.더 두꺼운 바람막이 점퍼를 꺼내자니 번거롭다. 내처 가다보면 체온이 오르겠지, 게으른 순례자는 고집스레 차가운 공기를 몸으로 밀며 걷는다.8시쯤 카페가 나타난다. 출발한지 30여 분 밖에 지나지 않았고 오늘은 중간에 12개의 작은 마을들이 있긴 하지만 여기서 몸을 추스르고 가야겠다. 마침 야외 테이블에서 어제 잠깐 마주쳤던 대만 아가씨들이 아침 식사를 하고 있다. 테이블을 보니 제대로 된 성찬을 즐기는 중이다. 반갑게 인사하며 한국어로 저 안에 한국인들이 있다고 알려 준다. K드라마로 배웠다는 한국어가 놀랍도록 유창하다. ‘엄지 척’을 해 주며 실내로 들어가자 한국인 부부가 있다. 인사를 나누고 나의 최애 음식 또르띠야와 오렌지 주스로 아침을 삼고 다시 출발한다.포장도로 펜스 바깥으로 이어지는 흙길을 따라 조금 걷자 오랜만에 경사가 심한 산길로 접어든다. 어제 물집을 제거한 덕분에 발걸음은 가볍다. 산세도 좋고 길도 좋다. 이런 길을 걸을 때면 늘 내가 좀 더 좋은 사람이 되는 기분이다. 거친 숨을 몰아쉬며 거침없이 경사를 오른다. 고통과 쾌감, 두 모순된 감정의 교차 속에 단숨에 경사의 끝을 향해 치고 올라간다. 어느덧 무난한 길이 나타난다, 이제 심한 경사지는 다 올라 왔겠지, 방심하는 순간 눈앞에 또 하나의 급경사가 양 허리에 주먹손을 얹은 채 가로막고 나선다. 길이 길을 가로막다니. 내친 김에 야심차게 부딪쳐 본다. 그런데 아이고, 뒤에서 누가 잡아 끄는 것만 같다. 짧은 거리가 줄어드는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 그렇다고 이 급경사에서 멈춰 버려서는 안 된다. 느리더라도 한 발을 앞으로 내 밀어야 한다. 멈춰버리면 다시 출발하기 쉽지 않다. 자전거는 말할 것도 없고 사람도 멈췄다가 재출발하려면 ‘멱살을 잡아끌고’ 가야한다. 인생과 길은 이렇게 닮았다.사실 이 길은 까미노에서 가장 가파른 산길로 알려져 있다. 해발 약 600여 미터인 라스헤리아스에서부터 서서히 시작되는 이 오름길은 라 파바와 라 라구나를 거쳐 해발 1,337미터인 오 세브레이로까지 이어지는 8킬로미터 거리다. 해발 600여 미터에서 시작되는 길임을 감안하면 정상까지 1,337미터는 별로 부담 없어 보이기도 하지만 몇 차례 급경사를 만나 자기 호흡을 놓쳐버리면 정상까지 내내 힘들어 할 수도 있다.정상에 도달하기 직전 레온 주가 끝나고 이제부터 갈리시아 주가 시작된다는 표지석이 나타난다. 단순한 표지석이라기보다는 하나의 예술품으로도 손색없다. 화려한 색상과 섬세한 조각이 그렇다. 빈틈없이 채워진 순례자들의 낙서들도 작품을 크게 해치지 않는 선에서 재잘거리고 있다.정상에 올라서자마자 갈리시아의 첫 마을 오 세브레이로가 기다리고 있다. 오 세브 레이로는 성체(聖體)와 성배(聖杯)의 기적으로 유명한 곳이라고 한다. 까미노를 부활시킨 돈 엘리아스 발리냐의 흉상과 산타 마리아 라 레알 성당 등이 있어 신심 깊은 순례자들은 꼭 둘러보고 간다고 한다. 스페인 건축물 중 가장 원시적 형태의 오래된 건축물인 빠요사를 개조한 민속박물관도 유명하다.오른쪽에 바가 보인다. 무작정 들어선다. 또르띠야 2개와 그랑데 오렌지 주스를 받아온다. 또르띠야가 두툼하니 실하다. 얼마나 컸던지 다 먹지 못하고 남은 걸 식전 빵과 함께 포장해 달라고 한다. 이 정도면 두어 시간 정도는 위장을 다독거려 줄 수 있겠다. 식전 빵은 여간해서는 손이 가지 않는 ‘비호감’이긴 해도 가끔은 ‘급호감’으로 바뀌기도 한다. 이렇게 ‘비호감’이 ‘급호감’으로 바뀌는 건 빵이 요사스런 탓일까, 내가 요사스런 탓일까. 아무려나 ‘괜찮은’ 간식거리를 챙겼으니 한동안 ‘보급투쟁’은 신경 쓰지 않아도 되겠다. 그러나 칼사디야 이후 5일 만에 재개한 나의 메모는 이때의 상황을 이렇게 증언한다. ‘남은 또르띠야와 식전 빵을 잘 포장해 받아서는 테이블 위에 다소곳이 놓아두고 떠났다.’사람이건, 빵이건 이렇게 인연이 닿지 않으면 안타까운 교차를 피할 길 없다. 아참, 물병도 그랬었지. 그러므로 매사에 애면글면 굴 것 없다. ‘안 되면 말고’ 한 마디로 매조지 해 버리면 될 일이다. 물건이건, 일이건. 설령 사람이나, 사랑이라 할지라도.마을을 통과하자 이제부터 서서히 내리막길로 접어든다. 우측으로 산을 넘어온 LU-633 도로가 나타난다. 다행히 까미노는 도로를 옆에 두고 숲으로 들어간다. 전혀 이국적이지는 않지만 내가 좋아하는 분위기의 오솔길이다. 당시 촬영한 동영상을 켜 본다. 카메라가 쩔뚝쩔뚝 다리를 전다. 하늘 높이 솟아 있는 나무들 사이로 오솔길은 유려하게 흐르고 있다. 안개로 유명한 갈리시아 주답게 저 아래 산들이 뿜어낸 허연 입김을 온몸에 둘렀다. 하늘은 짙은 구름에 덮여 있고 저 멀리는 환한 햇살이 내려앉고 있다.한동안 새소리와 발자국 소리, 간간히 지나가는 자동차 소음만 들리던 영상에서 ‘새앵각 나아안다. 그으 오솔기일….’ 하는 노래가 흘러나온다. 자연 다큐로 시작된 영상이 돌연 허접한 뮤직비디오로 바뀌어 버린다. ‘도옹구바아악 과아수워언기일….’로 이어지던 영상은 저 앞에 두 순례자와 점점 거리가 좁혀지자 온다간다 말도 없이 툭, 하고 끊어져 버린다. 부끄러운 줄은 안다. 그래도 내가 이날 어떤 길을 어떤 기분으로 걸었는지 알기에는 충분하다.한참을 이어지던 오솔길이 끝나가는 지점에서 산악자전거를 탄 두 여성 라이더가 지나간다. 그들이 사라진 지점에 오르고 보니 까미노가 다시 LU-633 도로와 만난다. 사방이 화발허통하다. 바람의 언덕 알토 데 산 로케 언덕이다.도로를 따라 몇 발짝 내려가자 머리에 쓴 모자를 누르며 강한 바람 속을 걷는 성 야고보 동상이 시선을 사로잡는다. 강풍에 모자가 날아갈세라 한 손으로 모자를 강하게 누르고 몸을 살짝 뒤틀어 바람을 피하고자 하는 동작이 잘 표현되어 있다. 바람에 날리는 옷자락 표현이 섬세하다. 그에게 불어 닥친 바람은 자연의 바람뿐이었을까. 그는 그 모진 바람들을 어떤 마음으로 받아내었을까.동상 가까이 다가가는 내게 아까 앞질러 가던 두 여성 라이더가 사진을 찍어 달란다. 흔쾌히 찍어 주었더니 나도 찍어 주겠단다. 그럼 땡큐지, 야고보 동상 옆에 가서 같은 포즈를 잡고 선다. 두 사람이 ‘와우, 굿 아이디어!’라며 깔깔거린다. 오른손으로 폴대를 짚고 왼손으로 모자를 누르며 엉덩이를 뒤로 빼 몸을 앞으로 꺾는다. 이 정도면 싱크로율 100%겠지, 하는 순간 두 사람이 박장대소한다. 왜? 뭐가 잘못된 거지? 아하, 포즈가 잘못됐나보다 하고 야고보의 포즈를 뒤돌아봐도 너무 가까워서 전체적인 자세가 한눈에 들어오지 않는다. 이리저리 포즈를 바꾸는 나를 보며 두 사람은 연신 배꼽을 잡고 웃기 바쁘다. 시키는 대로 연출하자 카메라감독이 그제야 오케이 사인을 준다. 이국의 라이더들에게 한 바탕 웃음을 안겨주고 먼저 자리를 뜬다. 민망해서 그런 건 아니었다.(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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