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로 안중근 의사의 순국 114주년이자 의거 115주년이다. 31세의 짧은 나이로 생을 마감한 안 의사는 1879년 황해도 해주에서 태어났다. 동학운동이 일어나자 아버지를 따라 동학농민군을 진압하는데 가담했으며, 가톨릭교에 입교하여 신식 학문을 접하고 신부에게 프랑스어를 배우고, 도마(Thomas)라는 세례명을 얻었다.1904년 홀로 평양에 나와 석탄상을 경영하고 이듬해 을사조약이 체결되는 것을 보자 상점을 팔아 1906년 그 돈으로 삼흥학교를 세우고, 이어 남포의 돈의학교를 인수해 인재양성에 힘썼다. 그러나 국운이 극도로 기울자 합법적인 방법으로는 나라를 바로세울 수 없다고 판단하여, 1907년 연해주로 가서 의병운동에 참가했다. 1909년 동지 11명과 죽음으로써 구국투쟁을 벌일 것을 손가락을 끊어 맹세하고 동의단지회(同義斷指會)를 결성했다. 그해 10월 침략의 원흉 이토 히로부미가 러시아 재무상 코코프체프와 회담하기 위해 만주 하얼빈에 온다는 소식을 듣고 그를 처단하기로 결심했다. 동지 우덕순과 함께 거사하기로 뜻을 같이하고 동지 조도선과 통역 유동하와 함께 이강의 후원을 받아 행동에 나섰다.10월 26일 일본인으로 가장, 하얼빈 역에 잠입해 역 플랫폼에서 러시아군의 군례를 받는 이토를 사살하고 하얼빈 총영사 가와카미 도시히코, 궁내대신 비서관 모리 타이지로, 만철 이사다나카 세이타로 등에게 중상을 입히고 현장에서 러시아 경찰에게 체포됐다. 일본 관헌에게 넘겨져 뤼순의 일본 감옥에 수감되었고 이듬해 2월 14일, 재판에서 사형이 선고됐으며, 옥중에서 ‘동양평화론’을 집필했다.안중근 의사는 이토 히로부미를 제거함으로써 동양평화를 도모코자 했다. 이토 히로부미는 제거했지만, 한국의 독립과 동양의 평화라는 목적을 달성하지 못했다. 하지만 조국의 독립을 위해서는 한국인이 독립심과 애국심을 가지고 일본에 대항해야 한다는 강인한 정신을 보여 주었고, 조국의 위기를 전 세계에 알리려고 했다. 안중근의 의거는 대한제국의 상황과 일제의 만행을 세계에 알리고, 주변의 약소국가들에는 희망을 준 사건이었다. 안중근 의사는 이미 100여 년 전에 아시아의 평화 체제를 구상하고 실천한 사상가였다. 그가 1910년 3월 26일 교수형이 집행되기 직전 행한 마지막 유언에서 “나의 거사는 동양평화를 위해 결행한 것이므로 형을 집행하는 관리들도 앞으로 한일 간에 화합하여 동양평화에 이바지하기 바란다”는 마지막 유언을 남겼다. 철학자 조지 산타야나는 “역사를 기억하지 못하는 자, 그 역사를 다시 살게 될 것이다”고 했다. 역사를 잊은 민족에게 미래는 없다는 말처럼 우리는 지난 역사를 망각하고 험난한 역사를 되풀이해서는 안 된다. 이제라도 우리는 안중근 의사가 사형집행으로 감옥에서 미완으로 남긴 ‘동양평화론’의 위대한 정신을 기억하고, 오늘에 이어가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