퇴계오솔길
도산원중수기념비
도산서원전경
퇴계 종택
[경상매일신문=박동수기자]퇴계는 1501년 음력 11월25일 도산면 온계리 노송정 종가(퇴계 퇴실)에서 아버지 식(1463~1502)과 어머니 춘천박씨(1470~1537)사이에서 8남매의 막내로 태어났다. 첫 번째 부인 의성 김씨에게서 잠, 하 두 아들과 딸 하나가 태어났고 계비인 춘천박씨 몸에서 서린, 의. 해, 징, 황이 태어났으나 맏이 서린은 관례를 치르기 전에 죽었다. 퇴계 집안이 온계에 터를 잡은 것은 할아버지 계양 때다. 당시에 이곳에는 사람이 거의 살지 않아 논밭이 묵어 있었는데 이것을 개간하여 많은 전답을 얻은 덕분에 진성이씨 예안파가 경제적으로 성장할 수 있었다. 퇴계 집안이 본격적으로 향리에서 사족으로 자리 잡게 된 것은 퇴계의 숙부 송재 이우가 대과에 급제하고 나서다. 형 이식이 40세에 병으로 죽은 후 조카교육까지 도맡고 나서는 등 실질적으로 퇴계 집안을 이끌어간 인물이 송재공이었다. 송재공은 아들, 조카들에게 책 한권을 완벽하게 외우게 한 후에 다른 책으로 옮겨갈 정도로 집안 자제들을 혹독하게 훈육했다. 사서를 비롯한 유교의 기본 경전은 모두 과거를 대비한 시험공부였는데 모두가 송재공의 뜻에 따른 것이었다. 그리고 이 시기 과거공부에 매진하던 퇴계는 모재 김안국을 만났는데 이는 퇴계의 삶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송재공이 49세의 나이로 죽기 두 달 전 아들 조카를 김안국이 강의하던 안동향교로 데려간 것이다. 퇴계는 17세 때 모재를 통해 처음으로 도학에 대해서 알게 되었다고 고백했을 만큼 이후 줄기차게 그의 삶을 지배한 것은 도학이었다. 19세가 되던 해에는 성리대전 70권 가운데 태극도설이 있던 첫 권과 송대 주요 성리학자의 글이 들어 있는 마지막 권을 손에 쥘 수 있었다. 이를 통해 퇴계는 우주의 자연원리가 인간 세상에 어떻게 상통하고 구현되는지 궁구하는 등 도학에 대한 열망이 차츰 깊어가는 계기가 되었다.
혼인은 21세에 이뤄졌다. 동갑인 진사 허찬의 딸 김해허씨와 혼인하여 23세에 되던 10월에 맏아들 준이 태어났다. 그 후 부인이 다시 둘째 채를 낳았으나 산후욕으로 6년 만에 죽고 말았다. 퇴계가 대과의 전초전인 진사시에 1등으로 합격한 것은 28세 때였다. 숙부 송재공이 죽은 후 자신의 공부 뒷바라지는 먼저 대과에 합격한 네 살 위의 형 온계 이해가 도맡아 했다. 퇴계가 권질의 딸 권씨 부인과의 두 번째 혼인을 올린 것은 허씨 부인이 죽고 3년 뒤인 30세 때다. 권씨 부인의 집안은 할아버지 권주가 참판 벼슬을 했고 숙부 권전이 예문과 수찬을 지낼 만큼 명문가였으나 권주가 갑자사화(1504)에 휘말려 사약 받은데 이어 삼촌 권전이 기묘사화(1519)로 죽음을 맞음으로써 집안이 풍비박산 났는데 권씨 부인은 이러한 상황을 감당하지 못해 정신이 나가버렸다. 퇴계와 권씨 부인 간의 결혼생활은 제자 이함형이 부부관계 문제로 자문을 구했을 때 자신의 지난 두 번의 결혼이 불행했다고 고백하는 것으로 보아 우여곡절이 많았던 것으로 보인다.
퇴계가 31세에 되던 해에 측실 사이에 아들 적이 태어났는데 실질적으로 집안의 대소사는 이 측실 부인이 도맡아 했다. 특히 허씨 부인이 죽은 후 집안의 실질적 안주인으로서 정실이 낳은 준과 채를 키운 까닭에 퇴학의 편지에는 너희 모, 혹은 서모에게 왜 편지를 하지 않느냐는 구절에서부터 서모의 친정어머니가 토계의 준에게 와서 머물렀다는 기록이 있는 것으로 보아 준과 채도 인정과 도리를 다해 서모의 가족을 돌본 것으로 보인다. 퇴계의 유언 가운데도 준에게 서모와 동생 적에게 살 집을 마련해 주라는 언급이 있는 데 이러한 인정을 각별하게 여기는 가풍은 지금까지도 이어져 퇴계 집안 족보 어디에도 서자(얼) 표기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33세 되던 해 퇴계는 두 번째로 성균관에 유학하여 모재 김안국의 제자인 하서 김인후를 만났는데 두 사람은 도학으로 단번에 하나가 되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이 해가 뜻 깊었던 것은 퇴계 사상 형성에 가장 지대한 영향을 미친 심경부주를 입수하는 행운을 손에 쥐었기 때문이었다. 심경부주는 송나라 학자 진덕수가 경전에서 심성 수양에 관한 구절에다 송대 철학자들의 학설을 합쳐서 만든 ‘심경’이라는 책이었는데 이것을 명나라 때 정민정이 다시 명대 학자들의 학설까지 덧붙여 만든 책이었다.
심경부주는 퇴계가 읽고 ‘심경후론’이라는 글을 발표한 이후 조선 선비들에게 꼭 읽어야 하는 필독서가 되었으며 사상사에서도 중요한 위치를 점하는 책이 되었다. 퇴계가 문과에 급제한 것은 그의 나이 34세 때다. 첫 벼슬은 승문원권지부정자였고 36세에는 정6품직인 호조좌랑이 되고 40세에는 정5품직인 사헌부 지평이 되어 임금을 교육하는 경연에도 참석하게 되었다. 조야에 덕망이 높아 매우 빠른 승진이었다. 그리고 퇴계 철학과 조선 사상사를 측면에서 빼놓을 수 없는 일이 주자대전과의 조우인데 이러한 인연이 43세 되던 해에 찾아왔다. 이는 뒷날 사칠논변이 일어나는 등 퇴계 인생은 물론 조선 유학사에도 기억될만한 일이었다. 44세에는 역사와 학문관은 물론 외교철학이 담긴 ‘걸물절왜사소’가 임금에게 올려졌다.
비록 당시 퇴계의 의견이 조정에 받아들여지지는 않았으나 미중일 북한과의 복잡한 관계 속에서 국익과 안전을 담보해야 하는 작금의 처지에서도 ‘걸물절왜사소’는 우리에게 여러모로 시사하는 바가 적지 않아 보인다. 46세 되던 1546년은 어려움이 한꺼번에 닥쳐왔다. 소윤 윤원형의 측근인 이기의 모함으로 삭탈관직이 되고 권씨 부인마저 7월에 세상을 등졌기 때문이다. 상례를 마친 퇴계는 그해 가을 그동안 살던 온계 남쪽 지산 근처의 작은 집에서 하계리 동암 옆에 양진암을 짓고 이사하면서 자신의 호를 퇴계라고 지었다. 이때부터 서서히 물러날 준비를 했다고 보여 진다. 명종 2년 47세에 임금과의 의리상 홍문관 응교의 벼슬에 나아갔으나 윤원형과 결탁한 훈구 세력의 권력 농단을 이기지 못하고 외직인 단양군수를 요청했다. 하지만 부임 한 달 만에 정혼한 상태에서 의령 작은 외할아버지 댁에 있던 둘째 아들 채가 죽었다는 기별을 받았다. 권씨 부인이 죽고 채 2년이 안 되어 자식마저 잃었으니 그 비통함을 퇴계는 단양의 산수와 두향에게서 위로 받을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이도 잠시 네째 형 이해가 충청감사로 오는 바람에 10개월 만에 인근의 풍기군수 자리로 옮겨야 했다. 그리고 이마저도 14개월 만에 그만두고 고향 토계로 돌아갔으나 집안의 불운은 그치지 않았다. 자신과 더불어 집안을 이끌어가던 온계 이해가 충청감사 재직시절 이홍윤의 모반 사건을 처리하는 과정에 연루되었다는 간신 이기의 모함을 받아 곧장 맞고 유배 가다가 몸에 독이 올라 객사한 것이다.
이 일을 겪은 후 퇴계는 인재를 길러 세상의 부조리를 근본적으로 바꾸겠다고 마음먹었는데 이 원대한 계획을 세우고 지은 첫 번째 집이 계상서당이었다. 명종7년인 52세에는 성균관 대사성이 되었으나 그만 둔 뒤로도 계속 벼슬이 제수되어 의정부 우찬성에 이르렀으나 오래 머무르지 않고 사퇴하는 일이 반복되었다. 그 와중에 53세에 정지운의 천명도를 수정하여 천명신도를 55세에는 이에 바탕을 둔 천명도설을 저술했다. 56세에는 홍문학부제학과 첨지중추부사의 부름을 마다하고 이루어낸 것이 ‘주자서절요’의 편찬이었고 57세에는 ‘계몽전의’를 완성했다. 본격적으로 퇴계 철학의 주요한 근간이 서서히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한 것은 이처럼 50세 이후의 일이었다. 그리고 그 절정이라고 할 수 있는 고봉 기대승과의 사단칠정 논변이 시작된 것 또한 58세 때였다. 두 사람 간 논변은 8년에 걸쳐 진행되었으며 그 결과 사단은 이가 발하여 기가 따르고 칠정은 기가 발하여 이가 탄다는 퇴계의 독자적인 이기절학이 탄생했다.
사칠논변은 10년 후에 고봉 기대승의 학설을 이은 율곡 이이와 퇴계의 철학을 이어받은 우계 성혼에 의해 계승되어 다시 6년간 논변을 이어가면서 조선 철학사의 주류에 자리매김했다. 그 와중에 1561년 퇴계가 환갑이 되던 해에 영남학파와 남인의 총본산이라고 할 수 있는 도산서당이 용수사 정일스님에 의해 완공되었다. 퇴계의 명성이 날로 높아지자 명종의 부름도 자자졌다. 홍문관 대제학과 예문관 대제학을 제수 받고도 퇴계가 상경하지 않자 명종은 독서당으로 행차하여 어진이(이황)를 불러도 오지 않는다는 시를 짓게 하고 화공을 도산으로 내려 보내서는 그곳의 경치를 그려오게 하여 병풍을 만들어 기거하는 방에 걸어두게 했다. 명종이 죽고 선조가 등극했으나 퇴계를 존경하는 조정의 분위기는 그대로였다. 선조는 종1품 우찬성으로 임명하고 퇴계를 불렀으나 사양하자 연이어 홍문관 대제학 예문관 대제학 그리고 지경연춘추관성균사를 겸하게 했다. 이때 68세의 퇴계가 17세의 어린 임금 선조에게 올린 것이 7천자가 넘는 상소문 ‘무진육조소’다. 국내 정치에 관한 퇴계의 대표적인 상소다. 1568년 12월 죽기 2년 전 선조에게 올린 ‘성학십도’는 바로 ‘무진육조소’를 구체화한 것인데 퇴계 학문의 완숙기에 완성된 것이다. 퇴계가 세상을 뜬 것은 1570년 선조 3년 12월6일이었다. 그의 말처럼 자연의 조화에 따라 돌아간 것이나 주자와 정자처럼 감히 명현의 행장을 짓겠다는 이가 없어 사후 6년만에 문순이라는 시호가 내려졌다. 광해군 2년인 1610년에 김굉필, 정여창, 조광조, 이언적과 함께 문묘에 배향되었다.
글, 최성달 작가 / 사진 박동수 기자